꽃이 한창일 때는 들뜬 채 빠져 있다가 이제 꽃 지고 신록이 부푸는 즈음에야 당신을 그립니다. 물론 짙은 초록 세상에서도 꽃은 쉼없이 피고 집니다. 다만 이전보다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이들과 언덕배기에 있는 정자에 올랐다가 까무룩 잦아든 적이 있습니다. 텁텁한 무더위에 놓여 있다가 정자 기둥과 서까래를 훑고 가는 선한 바람에 그만 누그러진 탓이었겠지요. 오색 찬란한 꿈이 기다렸던 것처럼 향연을 펼칩니다. 그게 어릴 적 시장 공터에서 만나던 서커스단 공연처럼 요란스러워 잠결에 무어라 소리도 지른 것 같습니다. 땀도 한 됫박이나 흘렸습니다. 대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못할 때쯤 어렴풋한 감촉에 눈을 뜹니다. 자는 동안 저희들끼리 뛰놀던 아이가 쫓아왔어요. 한아름의 꽃으로 제 아빠 목덜미를 간지르고는 눈을 장난스럽게 뜹니다.
"꽃이 참 예뻐요. 이게 무슨 꽃이에요?'
주변 숲가에서 아이 키보다 높게 자란 꽃 무리가 대궁 위에서 끄덕입니다. 콧잔등에 쏭글쏭글한 땀을 훔치며 얼결에 대답합니다.
'계란후라이꽃!'
아이들이 어이없는 중에도 깔깔깔 웃었습니다.
개망초. 나라를 빼앗긴 해에 유난히 많이 피어 망국의 한으로 지칭하게 되었다는 귀화식물입니다. 으레 입에 담으시던 당신 말 맞다나, 천지삐까리로 솟아서는 바야흐로 사방에서 물결칩니다. 이른 봄 쫓아간 남녘에서부터 올라오던 동백꽃, 진달래, 벚꽃, 철쭉, 때죽나무꽃, 쪽동백 등과 지난 번 집 주변에서 보던 튤립나무 꽃까지 가지런히 떠올렸습니다. 이제는 가물가물합니다. 당신이 무슨 꽃을 좋아했던지 낱낱이 떠올릴 수 없으니. 어느 때 당신이 우리를 떨치고 홀연히 가신 다음 텅빈 집에서 맞던 막막함에 어쩔 줄 모르기도 했습니다. 삶이 하찮고 비루해 견디기 힘들다는 막다른 감정에 휩쓸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어와 마침내 당신에 대한 기억이 흐릿할 정도로 오랜 동안 남아 있을지도 몰랐지요.
한때 메이저리거로 이름을 떨치던 박찬호 선수가 엊그제 자전에세이집을 내었다는군요.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그럴싸한 제목과 겹쳐 당신의 기일을 떠올리며 무릎을 쳤습니다. 내용이야 떠들어보지 않은들 누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제각기 한때를 풍미한 꽃처럼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나는 나의 시간을 영위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망촛대 위에서 꽃잎을 흩뜨리는 수국처럼 그렇게 자기 시간을 지내야 하는 것일까요. 이제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떤 색깔이었던가. 어느 때 간절했던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과 나의 시간이 어느 때 겹쳐져서는 그리움으로 남았듯이 그게 나중에라도 환한 웃음으로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시간을 새삼 기억하여 다음 생에서라도 한번쯤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lias Rahbani, Moonlight Melo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