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동행

*garden 2015. 9. 29. 22:13




"이른 아침부터 보이던데, 저 할머니는 여태 밭에 있었나 봐."
"집에 있으면 며느리가 불편해 한다고 나와 있다네요."
"그렇다고 종일 있어? 이 땡볕에 탈나지 않을까!"
"그 정도야 자각 못할라구. 그나저나 억척이 왠간해야지. 모다 외면할 정도이니....."
한뼘의 땅도 그냥 놀리지 않았다. 길과 경계진 비탈 쓸모없는 땅도 개간하여 호박이나 들깨 들을 심어둔다. 심지어는 우리 밭고랑에도 씨를 뿌려둔다. 처음에는 그게 풀인가 하여 뽑아 버리기도 했다. 어느 때 나갔더니 사뭇 언짢은 표정으로 구시렁댄다. 영문을 몰랐는데, 나중에야 그게 나를 향한 불평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밭고랑 주변에 싹튼 게 콩이라지 않는가. 어처구니가 없다. 엄연히 자기네 고랑도 있는데 왜 남의 고랑에까지 심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게 자라면 그늘이 져 여기 작물이 침해 받는 건 물론 내가 뿌려 둔 퇴비나 비료 등을 당연히 빨아들이지 않겠는가. 다툴 생각은 없지만 넘길 수도 없다. 조심스레 운을 떼어 경우에 맞지 않다고 하다가 기어이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당신 할 말만 내뱉는데다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LP에 바늘이 걸렸을 때처럼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데, 이런 말다툼까지 하는 내가 도리어 한심하다. 아무리 흙에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지만 과정이 순탄할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인가. 밭을 부쳐먹는 이곳 연세가 지긋한 이들은 하나같이 땅뙈기에 바치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단순히 거기 묻혀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우리가 예사로 떠올리는 상상을 뛰어 넘는다. 이들에게 대지는 신이다. 주변 누구도 해주지 않는 것을 베풀고 위안까지 주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이다. 어쩌면 이네들은 소일삼아 자기네 신에 빌붙어있는 내가 못마땅한 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그들에겐 내가 건성으로 오가는 얼뜨기처럼 보일지라도 나름대로 흙의 정직함과 위대함을 조금씩 느껴가는 중이다. 설렁설렁 씨를 뿌려두어도 열배백배로 결실을 내주는 땅이 신기하다. 당연히 시늉으로라도 신봉하며 몰두하지 않을 수 없다. 헌데 그게 예삿일이어야지. 온종일 세상 일을 쫓아다니다보니 흙을 일구거나 매만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들 손을 빌려 밭작물에 물을 준다거나 비료 뿌리는 일 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빌미가 되었을까. 할머니 입장에서는 그런 때마다 은연중 생기는 공돈이 아쉬운 걸까. 삯일이 자주 이어지든지 마주칠 때마다 부탁이라도 해야 하는데 무덤덤하게 지나치는 데 대한 섭섭함이 퉁명스런 반응으로 쫓아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번 고추밭에 농약을 칠 적만 해도 그렇다. 자기네 밭에 뿌리면서 같이 쳤다고 이르는데, 웃으며 덧붙이는 삯이 의외로 많다. 처음에는 농담인가 하여 적당히 주어 넘기려고 했는데 나중 정색하는 모습이 전혀 다른 얼굴이다. 그런 게 한두 번이어야지. 그냥 좋은 쪽으로 삭히며 표출하지 못하여 마음 상하는 일도 스트레스이다. 씁쓰레한 기분으로 돌아서서 입맛만 다셨다.

오래 전 땅주인이 심은 건지 밭둑에 대추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다. 어느 늦여름, 찾아온 친구와 둘러보다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대추는 꽃 핀 자리에 반드시 열매가 열릴 정도로 헛꽃이 없다.
"이야, 이 대추 좀 봐."
"알도 굵은데, 폐백 때 시부께 드리는 대추로 딱이고만."
아삭하게 익은 대추 한 알씩을 따 친구와 입에 머금었다.
"오, 꿀대추야. 달착지근한 맛이 일품이네."
대추는 열매에 비해 하나 뿐인 씨앗이 커 왕을 상징한다고 하여 제사상에 오른다는 설도 있다. 저쪽 밭 언저리에서 그걸 본 할머니가 쫓아왔다. 대추에 손대지 말라는 당부이다. 함께한 친구가 무안해 할까 봐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하는 데도 같은 잔소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한다. 그렇찮아도 뭔가 쏟아야 직성이 풀릴 참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내쏟고 말았다.
"이 대추나무가 할머니 것도 아니잖아요."
'아차!' 했는데, 두말없이 돌아가는 꾸부정한 뒷모습이 야박하다가도 서글프다. 그리고는 며칠 새 대추나무에 열린 열매는 눈 닦고 봐도 찾을 수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후로 할머니와는 정말 서먹한 채로 지내게 되었는데, 내가 밭에 보이기만 하면 쫓아와 실없는 인사치레라도 하던 노인네가 저만큼에서 눈치만 보고 다가오지 않았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빈 밭을 보았다. 황량하게 남아 늬엇한 햇빛을 담은 마른 풀이 애처롭다. 지난 봄 여름과 가을의 치열했던 삶과 거기 얽힌 온갖 부대낌이 아득한 옛일인 듯하다. 오가다 밭에서 경작하던 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이렇게도 만나네요.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러게요. 이제 농사도 못지을 듯합니다."
"왜요?"
"땅주인이 푯말을 세워 두었더군요. 더 이상 경작을 금한다고요."
"땅주인은 어디 산답니까?"
"글쎄요. 분당 어디쯤에 산다는데, 저도 본 적이 없어서요."
"....."
"오죽하면 주구장창 밭에 나와 살던 그 할머니도 더 이상 농사를 못짓겠다며 철수한다네요."
"그럼, 밭에 건물이라도 들어선다는 건가요?"
"그게 쉽겠습니까? 토공도 포기하고 빠져나간 땅인데..... 갖고 있는 땅주인들도 허탈할 겁니다."
개발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수익이 날 때 얘기다. 건설 경기가 얼어붙고 여파로 부동산마저 시원찮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되었다.
아는 도둑질이라고, 눈치를 보다가는 다시 흙을 갈고 씨를 뿌렸다. 때를 놓칠새라 다른 이들도 하나둘 합세하여 너도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인제 애초 우리에게 밭을 넘기고 간 노인네에게 경작 도지세를 주지 않아 속시원하다. 또 하나 그 지독한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헌데 알 수 없는 게 세상일이라더니, 상관할 건 아니지만 할머니가 앉은뱅이처럼 궁둥짝을 주저앉히고 종일 붙어 있던 그 밭뙈기에 더 지독한 여편네가 나타나 경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야말로 무법자였다. 이제까지 이 밭에 존재하는 모든 게 모두 자기 차지라는듯 휘저으며 부닥치는 사람들하고 쌈박질을 일삼았다. 진작 자리를 꿰차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까딱하면 나도 망신 당하지 않았을까.
참, 차를 세우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던 길목 대추나무 이야기이다. 어느 여름 태풍이 지난 다음 양평 청계산에 올랐는데, 산 들머리께 인가가 있었음직한 자리에 벼락 맞은 나무가 있었다. 일컬어 벽조목이라는 대추나무이다. 누군가 무거운 둥치를 가져가고 남은 부스러기를 본 등산객들이 그 조각을 줏느라고 법석이었다. 주렁주렁 열리는 대추처럼 후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곳 밭주인도 대추나무들을 심었을 게다. 대추나무 억센 가시는 지난 세월만큼 얽히고 설킨 다른 가지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 허나 우리는 무심코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주어야 스스로가 산다고 믿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더 땅을 갖기 위해, 수확물을 늘이기 위해 기를 쓰고 싸우는 동안 한날 한시에 밭 언저리 대추나무가 시름시름 앓더니 한꺼번에 고사를 했다. 며칠 전 보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기우뚱한 나무 등걸을 타고 둥근잎유홍초가 수많은 이파리를 이끌고 올라앉아 꽃을 피우고 있다. 또 하나 무심한 누군가는 아래쪽에 그물을 쳐 수세미 덩굴까지 끌어 올렸다. 썩어 흩뜨러진 나무들이 넘어지는 것도 시간 문제이다. 죽어서도 제대로이지 못한 대추나무를 보며 억척을 떤 할머니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일까.












Ramzi P. Haddad, Fading Away






'不平則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제 괜찮아야지  (0) 2015.10.16
그대 수선화  (0) 2015.10.11
또 한 계절  (0) 2015.09.18
지난 여름 밤  (0) 2015.09.14
일상 동화  (0) 201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