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커녕 여자 옆에만 가도 경기를 일으키는 내게, 연애편지를 써 달라는 친구 녀석. 얼토당토 않다며 뿌리쳐도 따라다니며 애걸하는 바람에 써 주었는데, 수십년 만에 떠억 찾아와서는 인제 주례사를 써 달란다.
"언제 주례사를 써 봤어야지."
"너라면 아무렇게나 써도 돼. 예전 그 연애편지가 감동적이었어, 야."
나야말로 기억에도 없다. 나중 녀석이 아이들 앞에 흔드는 '내가 쓴' 편지를 보고는 얼굴이 화끈했던 적은 있다. 아니, 이따위 글을 썼다니. 관념적인 문장이 생뚱맞게 나열되어서 가슴에 와 닿지도 않고 어렵다. 그걸 이곳저곳 떠벌이면 어떡하나. 뒤늦게 후회한들, 회수하려고 날뛴들 소용 없다. 대신 작정한다. 다시는 그런 부탁을 들어주지 말아야지. 그러고서도 '중 제 머리 못 깎듯' 그짓을 그만 두지 못하고 평생 해온 듯하다.
"요즘 그런 글 인터넷에 널려있어."
"야, 그걸 몰라서 그런 건 아니구. 네가 그 방면에 일가견이 있으니 일부러 부탁하는 거잖아."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며 늘어놓는 너스레를 당할 수 없다. 때로 본의 아닌 편견이 그 사람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니 우습기만 하다.
명절 차례를 지내고, 한 순배 술추렴하는 자리에서 일가붙이들에게 물었다. 차례 중에 절하며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딱히 속시원한 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우물쭈물하는 게 보인다. 오랜만에 뵙는 조상께 인사 드리고 안부 전하고 자식들 잘되게 해 달라고 빈다는데 과연 그럴까. 의례는 형식이어서 경건해야 하므로 잡생각이야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도 식구들이 모여 오순도순한 자리에서 너무 딱딱한 건 멋없다. 굳이 새긴다는 인사가 오래된 역사책 어느 한 대목 기술 같아서야 실감날까.
엎드려 절하며 한숨을 쉬었다. 차려입은 정장은 불편하고 채 가시지 않은 더위에 땀을 흘린다.
'저 왔습니다. 아니, 잘 계시지요? 덕분에 우리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둘러봐도 정치나 경제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네요. 그래도 식구들이 함께 모여 차례라도 지낼 수 있다니 이게 기적이겠지요. 각설하고.....'
대체 나의 기도는 왜 늘 뻔하여 버벅대기만 할까. 부탁으로 이름도 낯선 애인에게 밤새워 쓰던 연애편지처럼 메마르고 삭막해 한줌 온기도 전하지 못하는 헛된 웅얼거림으로 끝나야 하는 걸까. 그래도 당신이 저간의 사정 쯤이야 뻔하게 알아차리고서 쫓아와 담빡 안아주기만을 기다리는 걸까. 덧없는 가을 햇살이 내 기도처럼 비켜 흐르는 산길을 끝도 없이 따라가야 하는 것처럼 내내 익숙하지 못할까. 당신들에게 차려 드린 맛있는 음식을 챙겨 바리바리 싸갖고 올라왔더니, 그게 차 안에서 다 상해 음식 쓰레기만 만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