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해바라기

*garden 2016. 9. 5. 22:23




오후 들어 해가 났다. 산에서 내려오자 눈을 바로 뜨기 힘들다. 아침 나절 뿌리던 비와 일렁이던 바람이 온데간데 없다. 새삼 기승을 부리는 더위. 이마와 목덜미 땀을 대강 훔쳤다. 다행히도 한나절 머문 숲의 초록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다들 대단한 일이나 하고 온 것처럼 뻐기는 낯빛이다.
"그늘에서야 시원하지만 아직 햇볕은 뜨겁네."
"그래도 인제 여름 끝이야."
한 계절을 무사히 보낸 안도감일까. 감개무량한 음성이다. 투덜거림도 이어진다.
"에이, 버스가 사십여 분 뒤에나 오네!"
조금 전까지도 터지지 않던 스마트폰으로 재빠르게 배차시각을 점검했다. 상관없다. 일부는 여흥의 연장을 기대하며 두리번거린다. 건너편에 먼지를 뒤덮어 쓴 구멍가게가 있다. 제대로인 물건이나 있을까 싶었는데, 한둘이 건너가 얼린 맥주를 한아름이나 사 왔다. 시끌시끌한 기미에 낮은 벽돌집 쪽문이 열린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조심스레 내다보는 할머니. 어린 아이처럼 작달막한 키에 백발을 벙거지처럼 덮어쓰고 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쥐눈처럼 투명한 시선이 사람들을 훑었다. 순박하지만 의뭉스런 눈초리에 찔끔 놀랐다. 일행 하나가 인사를 하며 과자 봉지 하나를 슬그머니 내민다. 허리 복대를 철판처럼 두른 할머니가 지팡이를 휘저으며 한바퀴 돌았다. 여기서 떠들어? 주인은 나야, 하는 투이다. 뜨거운 햇살이 지천으로 내려앉는 묵정밭. 무성한 고구마 덩굴이 바닥을 긴다. 나무를 묶어 세운 받침대 사이 비틀린 노각이 한둘 매달려 있는 아슬한 풍경. 산행이 만만찮았다. 길도 없는 숲을 오르내리느라 헤맨 걸음 끝이다. 길이 힘들면 사람을 한데 묶는 힘도 있다. 평상 반을 차지한 해거름 귀퉁이에 어느새 쓰러져 있는 한둘 말고는 눈치를 보며 지레 떠들썩한데, 떨어뜨린 비닐봉지 하나가 눈에 거슬린다. 그걸 놓치지 않는 할머니.
"이게 뭐유?"
"아, 저희가 치우고 가겠습니다."
말로 하는 숱한 약속이 소용없다는 것을 익히 안다. 굳이 어설픈 걸음걸이로 비닐봉지를 지팡이에 걷어서는 내미는데. 여기서 오리만 가면 두어 해 전 세운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다. 상대적 박탈감에 치를 떠는 사람들만 남은 동네. 군사시설에 묶인 토지. 묘지와 들어서려는 화장장 들을 반대하는 울긋불긋한 플랑카드 나부랑이들이 편도 일차선을 따라 요란스럽다.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치는 낡은 동네지만 그래도 모른다. 칠흑같은 밤이면 활개치는 그 누가 있지 않을까나.
"이런 것 좀 흘리지 말어."
넉살 좋은 이가 비닐봉지를 받아서는 일부러 꾸깃꾸깃하여 배낭 옆에 담았다. 할머니가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사이 날갯죽지 너덜너덜한 제비나비가 날아들었다. 끝물인 백일홍, 시든 꽃을 더듬으며 남은 꿀을 허겁지겁 빨아대는 아쉬운 생애.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자동차 하나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이 시간. 괜히 이곳이 정겹다. 멀대처럼 솟은 해바라기가 기웃거리는 오후. 저마다의 삶이 거기 머물러 있다.
















Hilary Stagg, Forever And A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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