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동해. 드넓은 바다에 비해 삶의 터전은 좁다. 언덕배기를 따라 다닥다닥 붙은 계단집이 재래시장 한편에 쌓아둔 종이상자 같다. 행로를 가늠하기 어렵다. 움푹 패인 골짜기 묵정밭 건너편으로 넘어가려고 얽히고 설킨 골목길에서 헤맸다. 간신히 머리만 내놓은 묵호등대를 푯대 삼아 오르내리기를 두어 시간. 막다른 골목에서 찢긴 파도처럼 망연스럽기도 여러 번이었다가 녹슨 창문 틀 앞에서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 앞에서 사람인들 다를까. 두리번거리다가 꾸깃꾸깃 넣어 둔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보름이 가까운지 차오르는 바다. 포말로 흩어지는 어지럼증을 떨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