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또 다른 저녁

*garden 2009. 2. 11. 14:05



침을 삼키기 위해 목을 빼야 했다. 요지음은 좽일 날씨가 왜 이려? 구름이 낀 듯 꾸물거리기만 하고. 비가 언제 왔더라? 땅이 이리 가물면 온전한 게 있을 수 없지. 어느새 어두워졌나. 조금 전까지도 주위가 또렷하더니 사물을 분간할 수 없어. 그려도 이만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제. 침침한 가운데서도 어둠이 내리는 건 보인다. 밤은 순식간에 찾아오는 것 같어. 등판을 훑는 서늘한 바람. 맨날 밤이 시작되는 이때가 제일 싫여.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다. 동네라도 한바퀴 돌고 와야지.
나두 봄날 처자처럼 뽀송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게걸스럽진 않어도 바지런 떨며 살았건만, 어느새 황혼 들녘에 서서 모진 목숨 간신히 잇는 할망구가 되얏으니. 낮 동안엔 후덥지근해도 해 지면 으슬으슬하고만. 지난 겨울 되기 전 둘째네가 고운 누비덧옷을 가져왔길래 고맙게 받았더만, 이리 잘 입을 줄이야. 인조털이라도 목덜미 주위를 두른 게 폭닥하여 바람도 들지 않고 말여. 허긴 인자 몸 안 수분이 다 빠져 거칠고 딱딱한 수피만으로 견디는 고목같은 삶이니, 춥고 더븐 걸 가릴 수 있어야제. 한 번씩 바깥에 나서지 않으면 겨울이 지나갔는지, 봄이 왔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으니. 그나저나 종길이네는 어디 갔나. 와 저래 며칠 동안 대문을 걸어 놓고 있대? 혹시 몰라 멈칫거리며 가 본다. 틈새 입 벌린 저쪽 어둠을 노려보다 괜히 '콩콩콩' 두드린다. 안쪽에서 걸어두어 헐렁한 나무대문이 덜거럭거린다.
안즉 오지 않었나부네. 둑 너머 인섭이네 갠가. 마구 짖어 우렁찬 소리가 밤하늘을 울렁울렁하게 만드네. 저번에 봤을 때 그눔 튼실하기도 했지. 가만, 가서 찾아봐야지, 전화번호 적어 놓은 게 워디 있을 텐디. 근디 눈이 아른헌 게 뭐가 보여야 말씨.


역시 집엔 사람이 들끓어야 제격이다. 명절이라꼬 다들 몰려와 와글거린다. 저 냥반도 신났구먼.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저리 달구 있으니. 이눔저눔 뜸허게 애들을 델꼬 오니 이름도 가물거리지만서두.
'아 참, 야야. 거 종길네 전화번호 누가 몰르나? 그렇찮아도 이사람 저 사람 대처 나가부려선 비어가는 동네, 인자 갈 데가 있어야제. 며칠 동안 건넛집이 비어 있으니 궁금해서 견딜 수 있나. 저번에 시내 병원에 있다길래 종선이 델꼬 가 봤어야. 퇴원혔다든디. 집에 안오구 아들네 가 있나. 그래두 명색이 보름이니 연락이라도 해봐야제.'


애들 외할머니가 입원을 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점점 심각하다. 다들 제 앞가림하느라 정신 없던 아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얼굴을 맞댔다. 증세를 두고 수군대지만 뾰족한 수가 있어야지. 거기에 당신 고집은 고래 쇠심줄이다. 병원엘랑 가지 않겠다는 걸 얼르고 달래 간신히 시내 조그만 데 입원시킨 다음 몇 가지 검사를 하다가는 급기야 서울 신촌 큰 병원으로 옮겼다. 채 마흔이 되기 전에 청상과부가 되어선 육남매를 키워냈으니. 거세기만한 시동생들과 시누이들까지 다 건사해낸 다음에야 무슨 말을 덧붙일까.
저녁 나절 잠시 병원에 머물렀다. 구름 속에 들어있던 보름달이 슬쩍 모습을 드러내더만. 아득한 시절, 한복을 차려입고 마당에서 어머니와 함께 절하며 소원을 빌던 그때처럼 유난히 커다란 보름달이다.
병실은 부산했다. 문병객들이 오가고 종종거리는 간호사들이 환자마다 찾아다니며 주사를 놓거나 혈압을 재고, 채혈도 하고, 식사 때인지라 간병인들이 식기들을 떨거럭댄다. 그러다가 순간 조용해져 멀거니 건너편 환자를 보기도 한다. 종일 집에 가야 한다고 졸랐다나. 번갈아가며 간병하는데 오늘은 유난히 목소리가 큰 둘째딸 담당이다.
'집에 가믄 누가 엄마 밥이나 해 준대?'
이에 지지 않고 즉각 날아오는 큰소리의 맞대꾸.
'아, 며느리가 해주지.'
화왕산 억새 태우는 불길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속보가 뜨는데, 한 아주머니가 들어오더니 잽싸게 채널을 돌린다. 막장드라마니 뭐니 하면서도 시청율은 수직상승 중이라니, 다들 '아내의 유혹'을 안볼 수 있나.
답답하대서 억지로 휠체어에 옮겨 태우고는 바깥 복도를 어슬렁거린다. 딸이 슬쩍 목소리를 낮춘다.
'근디 엄마, 아깐 와 그래 소리를 질렀대?'
'그럼, 앞자리 누운 그 여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귀를 쫑긋하고 있는데 며느리가 밥해 준다 해야지. 내가 혼자 있다고 말함서 좋겠나? 남이사 우띃게 생각하든 그런 사정이야 들으면 되옮기고 싶어 환장허든디.'
천성을 감출 수 없다. 남의 말하기도 싫지만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싫다. 속내를 쉬이 드러내지도 않고 살아야지. 마침 멈추어 선 승강기 앞,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줄줄 내렸다.
'외숙모!'
팔이나 가슴에 주사나 고무관을 주렁주렁 단 어른을 보며 고모네 딸들이 부르짖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있던 고모가 한달음에 나와 손을 잡았다. 검게 탄 얼굴. 온통 주름 뿐인 낯이 실룩거린다.
'에고, 이 사람아. 여기 이러고 있음서 연락도 안혔나?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동네서 알 수 있어야제. 오늘 아이들이 오는 바람에 겨우 연락허구선 부리나케 달려왔네.'
다들 그렁그렁해 외면하는 척 눈가를 훔치기 바쁘다. 메마른 손이 앙가슴 앞에서 자벌레처럼 끄덕거리다가 상대를 보듬어 안으며 서로가 살아있음을 이제서야 확인한다.













Remember Me * Chris Spee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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