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세상을 움직이는 손

*garden 2009. 1. 30. 12:17



수업중 기사 작성과 인쇄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하던 선생님이 돌아본다.
아부지가 신문기자제?
이저를 따질 겨를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이르신다.
낼 신문 인쇄하는 데 쓰이는 연판 하나 주실 수 있는지 부탁드려봐라. 다들 봐야 알기 쉽겄제.


비릿한 냄새가 없어 당신이 즐겨 드시는 조기가 아침상에 올랐다. 노릇한 고깃살을 바르는 젓가락을 보며 조심스레 말씀드렸더니, 다음 날 정말 아연판 하나를 뜯어 오셨다. 글자가 거꾸로 박힌 음각판을 돌려보는 아이들 눈이 또록또록하다.
활판인쇄는 오랜 동안 인쇄술의 대강을 차지하였다. 억지로 업을 잇겠다는 작심이야 애초에 없다. 헌데 부자가 글을 만지는 길을 나란히 걷는 게 신기하다고 주변에선 입을 모은다. 서대문 로터리에 있는, 명색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활판소엘 들어가면 주위 눈 돌릴 참 없이 분주한 모습들과 대면한다. 인사를 건네기도 멋쩍어 애매한 헛기침만 날린다. 문선반 책임자인 이반장이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한다. 납 활자를 뽑던 면장갑으로 코를 만져 거뭇한 자국이 묻은 이반장은 종일 서서 작업한다. 눈이 작아도 매처럼 정확하게 활자를 분간하여 잡아챈다. 틀을 만들고 행과 열을 따지며 벽면 가득한 글자 중에서 필요한 글자를 뽑아 줄을 세우는 손길은 닳고 닳았다. 씨줄과 날줄에 맞도록 판에 활자를 채우면 다음 장의 활자를 다시 뽑았다. 활자를 쟁인 판들이 한켠에 쌓여 제각기 키를 돋운다.
그 안쪽에 옵셋 필름을 제작하는 정판소가 있다. 활판인쇄가 급격하게 사양길에 들어선지라 앞날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저녁 선술집에서 합석한 이반장은 씁쓰레하게 웃는다. 평생 다른 일을 해봤어야지요, 하면서 소주를 탁 털어 넣는다.
옵셋은 평판인쇄로 다색 정밀인쇄에 적합하다. 카메라로 찍은 다음 필름을 네가 상태에서 색에 따라 분리하는 전 과정이 복잡한데, 칼로 필름면에 적지를 붙인 다음 일일이 따내기도 한다. 어디에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여기도 숙련된 손이 필요했다. 멀리 동두천에서 출퇴근을 하는 김은주가 일을 하다 말고 커피를 타 온다. 잡기 쉽게 손잡이를 돌려 놓는 것을 보며 치사를 한다. 목례로 오는 웃음이 해맑다.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물자 볼 살이 탱탱하게 부어오른다. 필름을 손질하는 익숙한 손길을 보며, 물안개 피는 섬진강 농막에서 어느 새벽에 맡던 엷은 차향을 떠올린다. 왼손잡이여서 유리판에 테이프를 접은 다음 붙이고 떼고 적지를 따고 붓질을 하는 과정이 이채롭다. 전수 과정이 끝난 필름을 교정보고 다시 포지로 만들어 전지에 낱낱이 앉힌 다음 인쇄판을 굽기 위해 접지에 맞게끔 나열하여 붙이는 과정을 지켜본다.


책을 묶을 일이 생겨서 제작부에 가져간다. 담당은 마침 그런 일을 잘 하는 민속장인이 있다며 염려말라고 한다. 과연 나중에 제책 솜씨를 보니 매끈하여 나무랄 데가 없다.
간혹 틀린 글자가 포지필름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김은주는 지적한 곳을 꼼꼼하게 칼질하여 글자를 들어낸 다음 적확한 글자로 끼우고 투명테이프로 붙여 감쪽같이 수정해냈다. 세월이 흘러 볼이 오동통한 김은주를 떠올렸을 때에는 그네를 찾을 길 없었다. 인제 틀린 글자를 김은주처럼 수정하는 손길도 없다. 디지털적인 사고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새삼 아날로그적인 감각을 그린다면 딱한걸까.
이걸 어떡하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 상대는 씨익 웃는다. 어떡하긴요? 필름을 새로 뽑아 주셔야지요.
오자 하나 때문에 사색 필름을 다 뽑아야 하다니. 필름 한 장 생산해내지 못하는 국가에서 낭비를 따져봐야 무엇하겠는가. 호미로 구멍을 막기는커녕 다들 가래로 막는 것을 능사로 안다. 굳이 따지자면 효율성을 따라 움직인다고 해야 하는 건가.
겨울이 봄을 만들듯이 한 시대가 단순히 지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Song For Piano * Laurens Van Rooy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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