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우리가 나무였을 적에

*garden 2009. 2. 25. 15:24



잉잉대며 눈 흘기던 바람. 칼바위를 내려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하다. 이웃 아저씨처럼 넉살 좋은 웃음을 담고 걸음의 앞뒤에 걸리적거리면서. 산모퉁이를 휘감은 길은 내를 건넜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거듭하며 이어지다가 억센 오름을 하나 치고서야 백년 숲에 닿았다.
오감스러워 눈총을 받던 병선이 아재, 다행히도 사람이 뒤끝 없고 부지런하여 그나마 욕일랑 먹지 않았지. 봄여름가을이면 논밭에서 살아 새까맣고 단단하던 얼굴이 겨울에야 간신히 희멀개진다. 농사일말고는 심드렁할 뿐이다. 달구 아저씨와 농주라도 한잔 걸친 날이면 입에 배인 말을 중얼거린다. 동면이라도 헐 수 있다믄 얼매나 좋아. 해가 아랫채 돌담에 걸릴 적에야 기우뚱한 안방 문을 덜컥이며 퀘퀘한 냄새와 함께 기어나왔다. 툇마루 끝에서 허리를 두어 번 궁글리고 제꼈다가 가래침을 게워선 듬성듬성한 이 사이로 타악 뱉어냈다. 목이 꺾인 채 진흙 투성이로 댓돌 옆에 널브러진 아재가 신던 장화는 겨우내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지금 겨울이 그 짝이다. 지후하던 몸집일랑 주저앉히고 눕혀 천덕꾸러기로 바닥에서만 뒹굴거리니. 해빙의 시간, 서릿발이 풀리며 퍼썩해진 황토 비탈에 뭉툭한 바람이 코를 박았다.
여긴 직립의 힘이 득세한다. 너도 나도 한달음에 올린 키를 세우기 바쁜 세상. 간간히 섞인 참나무속의 너도밤나무랑 졸참나무 등 활엽수들도 감히 품을 키우지 못했다. 주저하면 하늘이 가려진다. 가지를 듬직하게 벋기에 앞서 햇빛 줄이라도 잡을려면 손이라도 높이 들어야 했다. 골을 타고 오른 바람이 억센 힘을 잃고 허둥거렸다. 쿨렁쿨렁 용틀임하는 언덕을 넘어 십여 리는 더 걸어야 나오는 이십여 호 남짓한 마을에는 칠순 넘은 노인네들조차 허리 휜 이가 드물었다. 한나절씩 숲에 들어 꼿꼿한 기상을 받은 탓이겠지.


불현듯 걸음을 멈춘다. 꿈을 꾼 게 언제더라. 그대와 내가 나무이고 숲이던 때를 떠올렸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감으로 혼곤하던 시절. 수피를 더듬는 바람을 느낀다. 쭉쭉 벋은 나무 사이 고개를 삐죽여 보았지. 푸르른 잎새로 덮히거나 헐벗은 알몸으로 견디거나 계절은 어김없이 몸에 금을 그었다. 어느 때 낮달을 지우고 그 해의 서설이 내려 사위를 덮었다. 그리움에 지친 존재들은 낮은 곳으로 떨어져 가쁜 숨을 쉬다가 사그라들었다. 태어나고 죽고 살아가는 일이 단순한 과정이던가. 아름드리 삶을 거부하고 싶었다. 안타까움 없는 부동의 자세를 견지하기 싫어 몸을 일으켰다. 지천이던 가을이 떠난 숲. 또 다른 세상이 절망이라도 어쩔 수 없어. 결연한 다짐으로 떠났다. 낯선 풍광에 부대끼며 스스로를 적응시키려고 애쓰던 나날. 새로운 곳에 닿을 때마다 바람에 소식을 맡겼다. 세상 가장 높이 치솟은 나무에 전해달라고. 그럴 때면 기억과 함께 떠올려진 후각을 돋워 코를 킁킁거렸다. 아아, 정든 숲의 싱그러운 향을 종내 지울 수 없었지. 움직이는 동안 잊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어도 살가운 교감의 기억이 다시 나를 그 자리로 이끌어다 놓곤 했다. 비로소 돌아온 숲에서 사방을 우러러본다. 레이처럼 걸린 지난 가을의 흔적이야 걷어내지 않아도 될 거야. 병주고향처럼 편안한 세상, 오롯한 숲길 따라 가면 쥬런으로 눈가 훔치며 돌아서던 너를 인제 손 내밀어 잡을 수 있을런가.













A Day With You * O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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