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게 작년 그 자리에 올해도 여지없이 노루귀가 피었구만.
아장대는 햇살을 따라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던 친구가 들뜬 음성을 보낸다. 마른 낙엽을 단속하고 숨을 가라앉히겠지. 몸을 낮추고 역광을 쟁여 솜털 보송송한 모습을 파인더에 담을 것이다.
조심스레 기웃거리는 봄. 그래도 조만간 낭자해진다. 이맘때면 회사 사람들과 여의도 벚꽃길에 나섰다. 북적이는 인파를 피해 대개는 정해진 식당으로 직행하지만 꽃그늘에서의 혼곤한 낭만을 잊지 못하는 동료들에게서 뜬금없이 연락이 오기도 한다.
올해 벚꽃놀이는 언제인가요? 불러주실 줄 알고 기다리는데.
순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오죽 좋을까. 벌집을 건드린 듯 어수선한 세상. 노 전대통령 소유로 의심되는 비자금에 대한 의혹이 난무하여 공방이 치열하다. 내전중의 혼돈과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판을 치는 소말리아 해적을 상대로 다국적 연합함대가 인근 해상에서 작전을 펼친다. 앞서 프랑스와 미국 인질을 각기 자국군대가 구출하였다고 한다. 해적이라고 얕본 게지. 이에 대한 반격으로 무차별적인 선박납치를 벌인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다. 일전 북한의 로켓발사실험 사태와 직접적인 연관이야 없겠지만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를 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가 이를 철회하며 갈팡질팡하는 정부. 여기에 PSI 참여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북한의 으름장 또한 불안한 게 사실이다. 실업대란이 일고 수능성적공개를 한다. 하지만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한된 인원만 정한 시간 동안 면회가 허용되는 중환자실. 머리를 밀어 깡마름이 돋보이는 비구니인양 무심한 눈만 깜박이는 모습을 보고 처사촌 형제는 눈물을 찍어낸다. 가습기에서 뿜어댄 증기가 염소도 되고 자동차도 되는 모습을 그리며 환자 손을 잡았다. 메말라 으스러질 것만 같은 손에 가볍지만 힘이 주어져 부르르 떤다. 인지가 되는걸까. 일반병동으로 옮겼다. 살 날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게다. 그렇다고 입 밖에 낼 수 있나.
한며칠 여름날처럼 달구어져 사방 꽃들이 깨어났다. 숙성될수록 안타까운 봄날. 처연하게 내린 비에 꽃잎은 물을 머금었다가 견디지 못하고 뚝뚝 떨어졌다. 긴 우산을 받혀들고 향한 병원. 신록의 길목, 야광나무가 솜방망이 같은 꽃대를 부풀린다. 신경이 짓눌렸는지 감각 없는 반신도 부풀었다. 임시방편이라며 간호사가 압박붕대로 부은 팔을 칭칭 감아둔다. 그래도 터지기 전의 폭죽처럼 아슬아슬한 손과 손가락들. 환자는 전에 없이 먹거리에 매달린다. 돌아눕히는 사이 눌린 곳이 아프다고 투정도 하며. 채워둔 기저귀에 맞닿은 살이 짓물렀는지 거동 어려운 채 움직이는 손으로 꼼지락대며 누가 보든 말든 긁기도 한다.
기분이 좀 어떠세요?
바닥에 우산 물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밝게 물었다.
으응, 인제 괜찮여.
기대하지 않던 대꾸가 바로 날아와 깜짝 놀랐다.
좋아지셨나 보네요.
다아 덕분이지, 뭐.
조심스레 신색을 살핀다. 눈동자가 반짝이는 게 얼굴에 화색이 돌아 좋다. 무엇보다 움직이기조차 못하던 팔을 의지대로 꿈적이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하나인 줄 알았지만 그렇지도 않아. 육신을 떠나서도 정신은 자유로웠다. 실 끊어진 연처럼 의지가지없다는 게 안타깝지. 귀 기울이지 않아도 사각거리며 다가드는 밤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뜰에서 조심스레 눈 뜨는 꽃들의 자취도 알았다. 허공을 떠돌다가 집집을 배회하기도 한다. 생전에 가봄직한 눈에 익은 곳에서 서성이며 기다리기도 했다. 아무도 오지 못하는 줄 알면서. 무엇이 근심스러운가.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이 다가와 눈을 들여다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배가 고프지 않은 데에도 밥을 먹어야 하다니.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내 먹어 주마.
식은땀을 억수같이 흘렸다. 배갯닛이 몇 번이나 흥건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개운해졌다. 차츰 영혼이 떠올랐다. 오늘은 둥실거리며 더욱 멀리 나가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