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잃어버린 우산

*garden 2009. 6. 16. 14:09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세상. 점점이 웅크린 나무 사이로 여름이 자취를 공고히 다진다. 구획된 아스팔트를 따라 장난감처럼 움직이는 자동차들. 오늘은 가로 올망졸망한 우산 행렬이 줄을 잇는다. 휘몰리며 아래쪽으로 빗금질하는 비. 허리를 구부려 키를 줄이던 바람이 요동친다. 들이치는 빗발이 선득하다. 막 현관에 선 아이들에게 당부한다.
손에 주렁주렁 들지 말고 간편하게 가렴. 우산도 챙겨서.
뒤따라 나서려고 장을 열었더니 들고 갈만한 우산이 마뜩치 않다. 살이 나가거나 떨어진 건 기본이고, 손잡이나 펴는 곳이 고장이거나 아니면 대가 구부러져 폐품 축에 넣을 것뿐이니.
이런, 우산이 하나같이 이 모양이야?
대체 이 녀석들은 밖에서 우산으로 활극이라도 벌이는건가. 정한 우산도 나갔다 오면 이 모양이 되니. 그대로 쓰거나 고칠 수도 없잖아. 예전처럼 수선하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아서는. 이참에 내버려야 하는건지. 요즘엔 우산도 단순 기능을 떠나 패션아이템으로까지 자리잡을 정도이더라만. 현란할 정도로 알록달록하고 선명한 색상에 무늬는 다양하여 저절로 눈길이 가게끔 하니.


우산은 십구세기 이후에야 일반화되었다. 이전까지는 오늘날과 다른 형태로, 여성 소품 정도로만 취급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원전 이집트에서는 귀족만의 전유물이었으며, 그리스나 로마인 들은 우산을 쓰는 행위를 나약한 자의 짓거리로 치부하였다. 관습에 따라 남자들은 비가 와도 모자를 쓰거나 마차를 타야 했으며 이도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그냥 젖게 두었다. 이러한 우산을 널리 보편화시킨 사람은 무역업을 하던 영국인 조나단 한웨이였다. 우리나라에는 구한말 선교사들에 의해 들여 왔는데, 오십년대까지는 부유층의 상징물이었을 정도이다. 우산의 영어 표기인 'Umbrella'는 '그늘'을 뜻하는 라틴어 'Umbra'에서 유래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어땠을까. 어느 때 억센 비를 피하려고 처마 아래 든 적이 있다. 눈앞에 아득한 물보라와 빗줄기. 도무지 그치지 않을 기세여서 우두커니 기다린다는 게 속절없다. 달려가 봐야 소용 없을 게고, 이내 나와선 터벅터벅 걷는다. 금새 물기로 달라붙은 옷감 위 김이 피어오르는데 의외로 기분은 좋다. 흥겨운 노래까지 소리낸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예외이다. 피하는게 상수이지만 어쩔 수 없이 운신하거나 우중에 논 물길을 틔워야 하는 때도 있다. 한뼘 거적데기라도 덮어야지. 이런 때 쓰는 것으로 '갈모라는 게 있었다. 갓모笠帽나 우모雨帽라고도 한다. 조선 선조때 이제신李濟臣의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又鯖堺語'에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짐작된다. 갈모는 펼치면 고깔 모양이 되고, 접으면 쥘부채처럼 된다. 기름먹인 갈모지(환지)에 가는 대오리로 접는 칸살마다 살을 붙여 만든다. 이와 다른 도롱이는 녹사의綠蓑衣나 우장雨裝이라고도 하는데, 어깨에 둘러 비가 흘러내리도록 만든 전통우비이다.


여름이 자리잡기도 전에 비가 잦다. 기후가 아열대로 변했다더니, 맑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져 뇌우를 동반한 비가 내리질 않나. 힘겨운 바람을 머금은 비가 감당치 못할 정도로 따뤄대기도 한다.
산중에서 비를 만나는 경우가 잦아 작아도 편리한 삼단우산을 늘 갖고 다녔다. 때마침 추적이는 비를 만나 내려오다가 일행과 북한산 뒤쪽 주막에 들른다. 출출함도 지우고 몸도 녹일 겸 앉았다 오는 중에, 나중에서야 거기 두고 온 우산이 떠올랐다. 새삼 찾으러 가기도 어려워선 차일피일 미룬다. 물건마다에 두는 애착이 각별한지라, 포기하거나 새로운 것을 장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른 때에는 한달이 멀다하고 다니던 곳을 웬일인지 몇 개월이나 넘기게 되었다. 드디어 여름을 목전에 두고, 옆길로 빠지는 일행을 독려하여 그 주막엘 다시 들렀다. 눈이 동그란 주막 아줌마 뒤에 떠억 버틴 주인장을 불러 채근한다. 이러저러한 우산을 두고 갔으니 찾아봐 달라고. 그렇찮아도 나처럼 아무 데나 물건을 두고 다니는 정신 나간 양반이 많은지 원, 한아름이나 되는 우산을 뒤지고서도 종내 찾지 못했다.


허긴 애초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기지도 않았건만. 누군가 주워 간 사람이 요긴하게 사용했으면 됐지. 그리 쉽게 생각하는게 마음이 편하다. 견물생심이라, 구할 적 바람과는 달리 주변 자리만 차지하고 널린 물건들을 본다. 손에 두면 틀림없이 좋으리라 여긴 건 왜인가. 쓰고 버리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만,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손때 묻은 채 견디는 물건들을 보면 세상 흐름에 역행하는 건 아닌가.
다시 사 봐야 색상이라든가 문양, 기능까지 유사한, 결국 잃은 우산의 후신을 고를 수야 없지. 이번에 탈피하여 전혀 다른 우산으로 장만하자. 또 한차례 비를 기다리며.












Shadows of the Dancer * Frank Mi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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