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끼리 어깨에 팔을 둘러 만드는 터널. 햇빛도 들지 않는 길이 한참이나 지속된다. 가파른 등성이를 치고 오르느라 번들거리던 맨살이 촉촉해진다. 수목 짙은 향이 폐부 깊이 스며든다. 그리고 맞는 암릉,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건너다 보는 숲의 바다. 바람 손길을 따라 물결이 갈라진다. 나무는 초록 꿈만 꾸고 도드라진 꽃이 시간의 덧없음을 한탄할 때 경계 없는 하늘과 땅의 구분을 갈망하여 살아 있음을 묵묵한 발걸음으로 새기려고 했었지. 평지에서 눈앞에 나타나는 걸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이다가 이곳에 올라서자 지난 길과 가야 할 길이 일목요연하게 구별된다. 인기척을 듣고 비둘기가 날아들어 주위를 맴돈다. 걔중 흰비둘기가 눈에 띄어 이채롭다.
비둘기는 창세기 노아의 홍수에 처음 등장한다. 물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을 때 근처 땅에서 감람나무 가지를 물고 돌아왔다고 한다. 성경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동안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구절도 있다.
이탈리아의 중세도시 아씨시로 향하는 길 등성이에는 더러 성이 있는 게 보인다. 성채를 중심으로 도시가 이루어지면 그 중앙에 성당이 들어서고 뾰족한 첨탑을 세운다. 가장 높은 곳에 기거해야만 하는 하느님 때문에.
아씨시에는 들어서는 순간 시계바늘이 천 년 뒤로 돌아간 듯 하다. 고색창연한 거리는 거닐수록 경탄스럽다. 예수와 가장 닮았다는 프란체스코 성인이 기거하던 수도원에는 조토를 비롯한 뛰어난 미술가들이 성당 천정과 벽면 가득 성인의 생애를 그림으로 채워 두었다. 구릉과 오래 된 아름드리 나무와 옛건축물로 조화롭게 채워진 아씨시는 성인의 빛나는 성덕과 불가사의한 행적, 사후 기적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 예를 들어 성인이 욕망을 지우기 위해 맨몸으로 딩굴었다는 뜰에 장미는 가시를 달지 않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꽃이 흔적 없을 때라도 장미 향기가 떠돈다는 사실과 성인 상像에 들린 비둘기 집에 아직도 흰비둘기가 살아 오는 이들 감탄을 자아낸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성인의 생전에는 새나 꽃까지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흰비둘기는 성격이 온순하여 길들이기 쉽다. 그러다 보니 마술 공연에도 종종 등장한다. 주로 러시아산 백비둘기가 잘 쓰인다. 시선을 끌기 쉬우며 다른 종에 비해 덩치가 작아도 날개를 펴면 커보이는 특징 때문일까. 드물게도 어미가 젖Pigeons milk으로 새끼를 키운다. 여느 포유류와는 달리 모이주머니 안쪽 벽 젖샘에서 액체상태로 분비되는 젖을 토해서.
말을 바꾸자면, 마술을 보는 관객들 대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주머니에서 비둘기를 꺼내고 손수건이나 모자 안에서 비둘기를 만들어내는게 가능하냐고 의문을 표시하며 속임수라고 단정한다. 이에 대해 마술사는 미소를 짓는다. 자신은 연출에 의해 관객 스스로 믿게 만들며 기대를 만족시켜 환호하게 하고 박수를 이끌어 낼 뿐이지, 속일 의도를 가진 게 아니다. 달리 말하면 즐거움과 재미, 놀라움을 주는 공연을 펼칠 뿐이라고 한다.
팬데믹Pandemic 재도래 시기이다. 기인하여 도시 하늘을 수놓는 비둘기도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둥지나 새끼치기, 배설물로 더러워지는 것을 보다 못한 사람들이 비둘기 알卵 수거, 비둘기 굶기기, 비둘기에게 모이 제공을 금하는 각종 퇴치안을 내고 있다. 새박사로 통하는 윤무부 교수는 입이 잔뜩 부어 퉁명스레 뱉는다. 비둘기에게 뭔 죄가 있느냐고.
글쎄, 고운 사람과 공원 귀퉁이 탁자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바라보는 비둘기 활공은 근사하다. 옆에 앉아 있던 노부부가 일어선다. 먹다 만 과자 부스러기를 탁탁 떨었는데, 금새 근방 비둘기란 비둘기는 죄다 달려들어 퍼드득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잊었던 얘기들을 기억해내며 다정하게 말을 나누는데, 깃털 난무하는 곳에서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