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가도 그 자리인 것만 같은 능선 자락. 공명의 팔진도에 들어 제자리를 맴도는 건 아닐 터인데, 어디쯤 왔을까. 인제 얼마나 남았을까. 예정한 시간 내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 엮는 갈래가 넝쿨이 되어 무성하다. 헛발을 디뎌 일순 몸의 균형을 잃었다. 전체 도정이나 구간을 굳이 곱새기지 말자. 숨을 깊이 쉬고, 걸음은 짧게 떼야지. 의도적으로 중얼거리며, 입술에 걸린 짭쪼롬한 땀의 간기를 빨아먹었다.
벼린 숲 창살로 드는 날카로운 햇살에 미간을 찌푸린다. 앙증맞지만 도드라진 자태가 나타났다. 담록이 무거운 비탈 기슭에서 도라지모싯대가 꽃망울을 부풀리고는 우주를 열듯 스스로를 소중하게 깨우는 중이다. 누가 처음 붙였는지, 이름을 되뇌이자 잘 어울리는 꽃의 이미지가 각인된다. 지나온 산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참에 숨이나 가라앉혀야지. 바람에 대를 끄덕이며 꽃이 방글거린다.
서랍 안에 널린 명함. 뒤적이며 오랜 동안 연락이 두절된 사람이나 장소를 더듬는다. 색상이나 디자인이 돋보이는 건 물론 금박까지 올려 눈길이 가도록 한 명함이 어느새 천덕꾸러기로 화해 떠들어 보는 적이 드물게 되었을까. 허기사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명함을 보고 전화를 해봐도 불통인 적이 많다. 손전화라든지 별도의 즉각적인 연락기기나 저장매체가 발달한 탓도 있지만 진득하게 한자리에 머물게끔 하지 못하는 사회여선. 연락이 가더라도 근황부터 캤다. 산중에서 문득 만나는 꽃처럼 정겨운 이름을 입에 담지도 못하고는.
꽃으로라도 의미로 남고 싶은 싯구처럼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꽃은 과연 몇인가. 어떤 이는 잠시 스쳤을 뿐인 데에도 강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주 보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런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저께 만난 이는 명함을 내밀며 이름보다는 아이디를 주지시킨다. doldul@로 나가길래 끄덕였는데, 알고 보니 이름이 이석이었다. 연관 짓고 연상시키는 감각이 돋보인다. 소통으로는 온라인이 대세이다 보니 누구나 닉네임이라든지 아이디를 갖고 있다. 이름이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인격 등의 대표성을 가진다는 데 부인하는 이 있을까. 그래도 장난처럼 아니면 우스꽝스럽고 얄궂게 지어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인디언의 이름처럼 세세하게 풀어 쓰지 않더라도 인상적이고 값진 호칭에 대한 고민을 대체로 하지 않으려는지. 부르기 좋고 쉽게 기억되는 이름으로 장만하면 오죽 좋을까. 예전에야 한자어를 중심으로 작명하다 보니 이름에 쓰이는 글자가 억지로 꿰어 맞춰지는 경우도 많다. 이게 빌미가 되어 별명이 만들어진다. 자연히 놀림감이던 별명이 입에 익어 나중에 만나서도 이름은 가뭇하기만 했다. 습관적으로 어른 앞에서 별명을 덜컥 사용해 난처한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이와는 다르지만 지나며 본 넷상 댓글 하나가 재미있다.
외근을 나갔다가 거래처 대리님 이름을 잘못 불렀어요. '방종구'를 '조방구'라고(대략난감).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불렀는지, 그것도 세 번씩이나 ㅠ0ㅠ;; 그 대리님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지금 생각만 해도 끔찍;;
낙관을 미덕으로 삼는 선배는 내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좋은 게 좋지? 끄덕이면서도 의문을 가진다. 과연 그러한가.
똑같은 사안도 보는 관점에 따라 한쪽에서는 이상하다며 외면하고, 다른 쪽에서는 멋있다며 환호를 보내는 형국이다. 심지어는 서로에게 고집을 강요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갈라서고 대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절대가치마저 내치는 판국에 무엇을 더 논하랴.
앞에 널린 수많은 날에 무시로 다가선 이들이 활짝 웃으며 손을 마주 잡는 것처럼, 떨어져 있더라도 보고 싶은 열망이 도라지모싯대 꽃 피우듯 부풀어 터뜨려지는 그런 엮음들이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