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안에 숨 죽이고 있던 어머니의 남빛 공단 치마저고리. 그 옷감처럼 푸르고 평온하던 지난 봄날 바다. 치즈가 녹아내리듯 양광이 넘쳐 흘렀다. 미동도 않는 물결 위에서 고깃배도 어쩌지 못해 정지한 풍경을 떠올렸는데. 동료들과 어울려 떠들썩하니 퍼붓던 어젯밤 술자리는 숙소인 쏠비치까지 이어져 끝날 줄 몰랐다. 오죽하면 조용해 달라는 소원이 서너 번이나 날아왔겠는가. 이도 모자라 아침 상에 떠억하니 술병들을 올려 두고 있으니. 맑은 소주를 끼얹을수록 몸 안 요동은 심해진다. 오늘은 약한 파도가 있다. 너울이 쉴새없이 몰려들어 설핏 현깃증을 부른다. 그런 때 동생 전화를 받았다. 부재중인 줄 모르고 들렀노라고. 부랴부랴 제 형수가 오징어두루치기를 했는데, 매콤한 맛이 좋아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나.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매콤한 맛이 장기인 아내의 손맛.
명절 음식을 할 적이면 어머니는 꼭 아내를 시켰다. 어물쩍거리기도 계면쩍은 동생댁은 괜히 바깥을 맴돈다. 어머니가 작은며느리에게는 부엌에 들지 않아도 된다고 아예 못을 박았으므로. 지금은 어른이 계시지 않은 부엌일이 싫은지, 아니면 귀향길 북새통이 싫은지 명절이 되어도 아내는 더 이상 시골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두어 번 채근해 봤지만 예전 아내가 아니었다.
손맛내기의 한계를 일찍 깨달은 동생댁은, 격식 때문에라도 몇 번은 혼자 차례음식을 장만했다. 제기를 닦던 동생이 다가가서는 방금 부친 전을 맛본다. 몇 번이나 쩝쩝, 소리나게 입맛을 다시다가는 혀를 찬다. 좀더 맛깔나게 할 수 없느냐면서 핀잔을 날린다.
다음 명절부터는 동생댁도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할인점 식품가게마다 들러 사 온 음식, 랩을 뜯어 다른 접시에 푸욱 뒤집어 담아서는 손가락으로 가에 묻은 양념 흔적을 지워 올린다. 차례를 지낸 사촌들이 상에 앉았다. 공치사라도 하고 싶은데, 첫 숟가락을 뜨면 네맛도 내맛도 아니어서 꿀꺽 침만 삼키고 말았다. 서너 번을 그렇게 지나자 동생댁은 마침 나가기 시작한 교회를 빌미로 더 이상 차례나 제를 지내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이제 내려가면 집 안 여기저기 십자가만 요란하다.
큰 녀석이 입대를 하고서는 혼자 오가는 명절 걸음마저 적적하게 되었다. 작은 녀석은 제 엄마 눈치를 보며 주저앉아서는 꿈쩍하지 않으니. 힘이 있어야 예전처럼 우격다짐으로라도 끌지. 그렇다고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으니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사촌들이야 속 없는 말을 날린다.
그냥 오소. 그렇게라도 모여야지.
그래. 대답을 씹으며 나도 끄덕인다. 명절 지내기가 전처럼 단순하지 않아. 집집마다 하루가 다르게 큰 아이들은 낯설고, 내려 갈 적마다 당신들 빈 자리는 커 보이니. 전통이 아니라도 고수해야 마땅하지만 아우르기 힘든 이 지경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가끔은 정황과 확연히 다른 생각이 불쑥불쑥 치솟아 자리잡아서는 곤란하다.
때 아니게 꽃을 피운 나무를 보았다. 놀랍기도 하고 일면 애처롭기 그지 없다. 새삼 지난 날 잣대로 현실을 보며 재단하는 게 나뿐일까.
Suzanne Ciani * R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