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치 않은 수다가 계속 이어진다. 사무실에서 그러고 있으려니 주변에 신경이 쓰여 나중에는 이마가 뜨끈하다. 이넘 가시나가 목소리는 왜 이리 커? 짧은 응대만 하려고 해도 그럴 수 있어야지. 다들 무심한 척하고선 쫑긋하는 모습. 옆에 소근거리겠지. 저 사람이 이른 시각부터 웬일이람. 그러거나 말거나 전화기 안에서 여자애는 더욱 신이 나 고음으로 떠든다. 코맹맹이 소리로 덕지덕지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엄지손가락으로 나는 정수리를 꾹꾹 눌렀다.
일 방해하는 거 아이지? 그렇찮아도 일간 함 올라갈라꼬. 반겨줄 꺼제?
전화질이야 가끔 하지만 그렇다고 살가운 사이도 아니어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통화를 마치고서야 확연해진다. 나와 같은 모임에 있는 줄 착각하고, 근황을 들을 수 없는 찬욱이 소식이 궁금한 게다. 그렇다고 얼마 전 대형마트를 하나 인수했답시고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던 애가 느닷없이 올라오겠다니.
바람이 제법 선득하다. 옷깃을 여미고 손바닥을 부비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느끼는 허허로움. 꽉 채운 줄 알았는데 들여다 보면 텅 빈 가슴에 스산한 바람만 잉잉 댄다. 이것저것 쓸데없이 더듬다 보면 회의감마저 들고. 이러지 않았는데, 하며 도리질하지만 걷잡을 수 없다. 숨이 가쁘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짜증만 난다. 그나마 생각나는 이라도 있어 훌쩍 일어설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런 데 비해 나야말로 어릴 적 짝꿍 이름 하나 뚜렷하게 떠올리지 못하고 어찌 이리 무덤덤한가. 고민한 다음에야 겨우 갓 입학한 때의 학예회를 떠올렸다. 숫기 없는 나를 누가 무대에 세웠는지. 연습하고 연습했다고 해도 막상 수 많은 눈길과 웅성거림을 앞에 두자 어쩔 줄 모른다. 침착하려고 입술을 깨물수록 땀이 나고 얼굴은 백짓장이 되어 울상이다. 그런데 상대역이던 이분이 고 계집애가 보통내기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주눅 든 내게 성큼 다가와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는다. 나중 친구들의 놀림이나 되지 않을까 싶어 비명이 절로 나는데, 이분이는 능청스레 제 역을 해낸다. 거기 휘말려 얼렁뚱땅 연극을 마치고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집으로 가는 길은 홀가분하다. 힘에 부친 숙제를 마친 듯 개운한데 무엇보다 이분이와 함께 한 기억이 좋다. 이전보다 훨씬 친해진 것만 같으니. 아니나 다를까. 무대 위에서의 당찬 기세나 또박또박하던 말투를 누그러뜨리면서 다소곳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 집에 과일 많은 데 들러서 하나 줄까?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걔네 집이 보인다. 담장 위에 가지런히 박아 둔 깨진 유리에 느긋한 햇살이 앉아 반짝거린다. 덩굴장미가 가시에 백테가 낀 채로 지친 가지를 늘어뜨린다. 가로 늦게 핀 메꽃이 수줍게 낯을 가린다. 부실한 포도덩굴을 이고, 현관 입구 시렁은 겉면에 일어나는 페인트로 까실까실했다. 이미 가을이 한창이어서 포도가 남아 있을 리는 없고. 손바닥을 쳐든 듯 잎자루를 세운 무화과나무 아래 가 서는 계집아이. 낭창낭창한 가지를 조그만 손이 비틀어 끌어내린다. 꽃이 없다고 이름 붙여진 무화. 사실은 열매가 꽃주머니이다. 뚝 딴 꽃을 성큼 내밀기에 얼결에 받았다. 손이 다시 벋어 무화를 딴다. 그리고는 시범을 보이듯 반 갈라서는 커다랗고 하얀 대문니를 내보이며 무화과 속을 다람쥐처럼 갉아먹는다. 나도 똑같이 따라 한다. 볼품 없고 향기도 없는 과일에서 웃음이 햇살처럼 돋아난다. 달콤한 과육이 입 안에서 꿀처럼 맴돌다가 꿀꺽 넘어간다.
바람이 지나며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뭇잎을 떨어뜨렸다. 길가에 흩어진 낙엽이 춤을 추었다. 바람 속에 어떤 이름은 떠올리려고 해도 가뭇했다. 대신에 조금씩 기억의 창고를 더듬어 가면 고깃비늘처럼 일어나 반짝이는 얼굴들.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가 어느새 손을 잡아 행복해지던 시간들. 달려 온 가을이 벌써 닁큼닁큼 지나간다.
Magic Winds * Band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