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일로 사무실에 행차한 우 모님. 오랜만에 정담도 주고받고, 주변 사람들 근황을 되뇌인다. 함께 간 이곳저곳 길도 겹쳐보며 생각을 궁글린다. 슬쩍 트집을 잡자면, '다시 한 번 떠납시다.'가 마땅한데, 서늘한 눈을 껌벅이며 쳐다보더니 불쑥 던진다.
"술 한잔 합세다."
"엥, 차는 어카구요?"
"까이껏, 대리를 해도 되고."
어둑어둑한 게 술시에 접어들지만 갸웃거리며 이모저모를 따져봐도 여의치 않아 고개를 흔든다.
"언제 술 거절하는 것 봤남요?"
한해의 막바지에서 다들 숨가쁘다. 책상에 파묻은 머리를 쳐들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마감기일을 지키려면 가욋손이라도 아쉬운 때여서, 예전 동료까지 불러냈다. 전화상으로는 펑퍼짐하고 악착스러운 아줌마가 되었다면서 설레발을 놓더니 정작 만나보면 고운 옛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과장된 몸짓으로 낄낄거리며 입도 가리다가도 교정지 글밭에 내몰자 금세 예전으로 돌아간다.
글자는 뭉쳐 있으면 변별이 어렵다. 하나마다 갈래친 줄기를 찾아내 더듬고 앞뒤를 잰다. 자음과 모음이 바르게 엮였는가, 글자와 글자의 연결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이것저것 따지며 튼실하지 못한 것, 잘못 달린 것, 엉뚱한 것 들을 골라낸다. 여기저기 끌려오는 뿌리가 바로 되어 있는지도 일일이 따져야 한다. 집중하고 동공을 굴리다 보면 배가 쉬이 고팠다. 밭 고랑마다 나앉아 호미질만 하게 내둘 수도 없지. 하루 한끼만으로 거뜬하게 견디는 사람도 있다는 데, 그런 기인들 행각은 흥미롭지만 당혹스러운 게 사실이다. 삼시세끼 다 찾아 먹기가 더러 버거워도 먹고 돌아서면 배 고프다는 아이들 아니더라도, 익숙한 습관이니 따라야 한다. 더구나 세계 어디를 따질 것 없이 보편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은 다음에야. 오늘처럼 날궂이 하는 때면 바깥 식당을 기웃거리기도 편치 않다. 주변 잘 아는 집이 있어 전화를 한다.
"오늘은 예전처럼 도시락을 시켰는데 괜찮지?"
도시락이 배달되었다. 성에 차지야 않겠지만 정갈한 음식이 입맛을 자극한다.
식도락도 크나큰 즐거움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씹고 삼키며 음식을 잘게 쪼개어 맛을 음미하는 중 요동치는 내장에 실룩이는 포만감. 자연히 지난 이야기가 줄줄이 나와 입가를 벙긋거리게 만든다.
도시락을 싸들고 다닐 적이다. 어머니가 담근 맛있는 고추장을 별도로 담아 갔다. 매운맛이 일품이었는지 콧잔등에 땀을 송글거리면서 너도나도 찍어먹기 바쁘다. 작정한 누군가 아랫식당에 가서 양푼을 얻어 와선 이 사람 저 사람 밥을 넣어 한데 비빈다. 맛있게 비벼지는 밥을 한 숟가락 가득 떠 입에 담기도 한다. 문득 우스운 이야기를 꺼냈는데, 입 안 가득 밥을 머금었던 사람이 이를 터뜨려 밥알이 사방으로 튀겨진 적이 있다. 곳곳에 잠복한 불순물을 일일이 골라낼 수도 없다.
냉난방 시설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이라, 사무실에 고작 연탄이나 석유난로를 사용할 때이다. 점심시간 전이면 양은도시락을 난로에 올려 둔다. 밥이라도 따끈따끈하게 먹어야지. 나중 극성인 여직원들이 더러 있어 찌개를 끓이기도 했지만 냄새 등이 남아 이를 금하기도 했다. 점심때 아쉬운 것이 국물이다. 생각을 굴린 누군가 시중에 막 나온 사발면을 큰 것으로 사 왔다. 따뜻한 물을 부어 난로에 터억 올려 둔 다음 반찬을 꺼내고 도시락 뚜껑을 여는 한편 재담도 바쁘다. 그리고는 눈길을 돌리는데, 사발면 물이 끓고 있는 게 보인다.
"이것 봐, 뜨거운 물이 아직도 끓고 있다니!"
가리키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걸 본 옆사람이 기겁한다. 스티로폼 째로 난로 위에 올려 두고 있다니. 황망중에 또 다른 이가 이를 들어냈다. 물론 속 알맹이가 난로 위에 엎어져 엉망이 되었다. 점심을 먹으려다 말고 다들 박장대소를 했다.
"그 때 범인이 바로 당신이잖여!"
오래된 이야기는 먼지를 이고 삐뚝빼뚝 걸어나와도 정겹다. 끼니를 거르면서도 파종할 씨보리를 악착같이 감춰두던 부모를 봐 온 세월, 먹는다는 게 사는 일의 으뜸에 꼽힐 적이었다. 낯 붉히고 몰래 숨어 울던 이야기라도 앞뒤 받혀주던 순수한 사람들이 있어 돌아가 다시금 뺨을 부비고 싶은 시간들. 때 아닌 해의 막바지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꺼낸 생각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들지 않고 입맛을 혼곤하게 만든다.
Beauty Of Forgiveness, etc. * Frederic Dela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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