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길에서

*garden 2009. 12. 4. 15:36




박무가 군데군데 몸을 일으켜 휘청이는 밤거리. 가로등 뿌연 불빛 아래서 택시들이 털털거리며 기웃한다. 방금 술집에서 한둘씩 쫓아나온 우리 일행은 목청을 높여 기고만장이다. 술이 오를 대로 올라서, 지나던 사람들조차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해간다. 다음 일정을 떠올리며 나는 이만 마치자는 얘기를 꺼냈고, 이에 불만인 한 녀석이 딴지를 건다. '진작 정해진 약속 다음에 또 약속을 겹쳐 잡는 이유가 뭐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급기야는 인간성까지 매도한다. 몇년째 노인병원에서 연명하는 자기 어머니한테 문병조차 오지 않은 것까지 들먹이는데, 다툼과 함께 패가 갈려 소음이 점점 심해졌다. 노여움을 드러내려다가는 실소하고 말았다.

젊은 날, 우리 꼬마를 데리고 뵌 적이 있다. 천진난만함이 마음에 남았던지, 찾을 적마다 안부를 묻던 어머니. 친구의 어디가 어머니와 닮았는가 견주어 봤더니 잘잘한 눈웃음이 늘상 떠나지 않는 친근한 눈매이다. 연세에도 불구하고 하얀 살결과 고운 말씨에 박꽃처럼 아름다웠을 어머님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고는 슬쩍 얼굴을 붉히곤 했다. 고관절을 다쳐 병원에 계신 적이 근 몇년이나 되었다는데.

해의 막바지에서 다들 조급하다. 와중에 바쁘다는 핑게로 등한시했던 자리에서 빗발치는 전화. 이제 한번 봐야 하지 않겠냐는 아우성에 일어선다. 지방 길은 때 아닌 비에 젖어 질척거린다. 그 어디메쯤에서 전갈 한 통을 받았다. 멀기도 하지만 길마다 늘어진 차를 헤치고선 원점회귀하기가 어찌 그리 더딘지. 자정이 가까워서야 친구와 대면하고 앉았다.

어릴 적 살던 미아리 옛 기와집에 찾아갔다고 한다. 지금은 그 집이 남아 있는지도 어렴풋한 데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서슴없이 올라가자 낯익은 대문이 보이지 않는가. 당연히 문을 열고 들어가 우선 부엌으로 간다. 안방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있어 봉창을 열고 들여다 본다. 둥그렇게 좌정한 어른들은 다들 알만한 얼굴들이다. 헌데 이상하다. 마땅히 있어야 할 바깥쪽 벽이 없어 산지사방 골목길로 이어져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인가 싶어 여쭈려 하자 이 켠으로 고개를 돌린 어머니가 눈짓을 한다. 아무 얘기 말라는 듯. 그리고는 별반 도드라지지도 않은 화장을 마치고는 일어선다. 오랜 동안 안계셔서 인제는 기억에도 없는 친인척 어른들도 함께 일어서서는 휑하니 떠나는 꿈이라니.
이틀 전 그 꿈이 생시인 듯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기별을 남기시고는 눈을 감으신 당신이 서러워 펑펑 울었다고 한다.

한낮 길을 재촉할 적에 마른 대궁만으로 남은 당신의 자궁같은 연밭을 만났다. 싱그럽던 삶으로 채운 어제와 생기를 날려버린 오늘이 어디가 다른가 싶어 차창을 내렸다. 빗기를 품은 바람이 냉큼 상체를 들이밀었다. 그게 낯설지 않아 코를 킁킁거렸다. 초겨울 비라기엔 심하게 내려 촉급한 마음과는 달리 나아가지 않는다. 물끄러미 바깥을 보며 잠기는 생각. 하염없이 늘어진 길을 따라 몇 날 며칠 걷는 몸짓을 떠올렸다. 다들 어디에 서 있는가, 또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Nastalgia * Philippe Alexandre Belis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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