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수다로 살기

*garden 2010. 2. 5. 17:57




유선으로 방영되는 마카로니 웨스턴 한편. 딱히 별일 없던 참에 늦은 시각까지 딩굴거리며 보았다. 홍콩판 무협영화처럼 한때 들어오기만 하면 사족 못쓰곤 득달같이 달려갔었는데. 활극 등에 질색하는 아내도 옆에서 시청한다. 남녀가 생각하는 영역이 다른지라 가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나 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잇다 보니, 본의 아니게 예전 기억을 되살려 신나게 떠든다. 존 웨인이라든지 헨리 폰다 등 잘 알려진 배우 외에도 아란 랏드나 리차드 리드마크, 버트 랑카스터, 게리 쿠퍼, 그레고리 펙에서 스티브 맥퀸이나 커크 다그라스, 제임스 코번과 크린트 이스트우드까지 줄줄 꿰어내자,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느냐는 등 감탄한다. 우쭐해서는 더욱 그칠 수 없다. 헛기침을 하며 서부극에 빠질 수 없는 역마차의 존 포드 감독이랑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까지 들며 일장연설을 했더니 기갈이 난다. 허긴 밑천이 드러날 때도 되었지. 표 내지 말아야지. 벌떡 일어나서는 냉장고 안 맥주 캔 하나를 꺼내왔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남자들이 모이면 으레 빠지지 않는 군대 이야기. 거기서 거기인 뻔한 이야기가 '나도 말인데.....' 하며 꺼내 확대 재생산되면 끝간 데 없이 이어진다. 혹시라도 자리에 이성이라도 있다면 금방 손을 들어 저지한다. '남자들이란 그저.' 사래짓에 혀를 찬다. 그제야 다 못한 말을 씹으며 씁쓰레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남자들. 그런 걸 보면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이에게 지난 일을 맛깔나게 되살려내 들려주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닌지. '아빠가 너만 할 적 말인데.....' 우리 꼬마를 앉혀 놓고 중언부언 꺼내면 이내 아내도 자기 경험을 덧붙이며 가세한다. 하지만 꼬마야말로 따분하기 그지없다. 실감나지 않는 소리가 아이 옆에서 따로 노는 게 보인다. 이미 시작한 지라 마지못해 풀어가지만 듣는 입장에서도 고역이다. 하품이나 해대며 눈을 멀뚱거리기 십상이니. 지난 일이, 기억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나이 든 사람들만의 전유물인 걸까.


아이들은 브랜드로 통일되어 있나보다. 그걸로 '옷을 사 줄 수 없느냐?' 고 슬쩍 말을 꺼낸 녀석이 며칠 전부터는 아예 대놓고 조른다. 옷이야 아무런들, 헤지거나 궁상맞지 않은 옷이 줄줄이 걸려 있더만. 뇌까린들 귀로 들어갈 리 없다. 사 주기 싫은 것보다 잔소리하기가 입에 배인 건 아닐까. 개학일을 앞두고 결국 회사 근방으로 찾아온 녀석에게 져 일어섰다. 근방에 그 브랜드랑 관련 있는 디자인실에 누군가 있었지. 이곳저곳 알아보고 통화를 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두어 코스라 차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갔다. 입춘에 장독 깨어진다더니, 뚝 떨어진 기온이 만만찮다. 게다가 만리동 고갯길이라 힘겹게 오르는 데 쌀쌀하기가 오죽해야지. 허나 바라던 옷을 얻어 입을 생각에 녀석은 툴툴거릴 낌새가 없다. 결재를 하며 만만찮은 가격에 입이 벌어질 지경이지만 습관처럼 잔소리를 꺼내지 말아야지. 유난히 강추위가 맹위를 떨친 겨울. 그 동안 장롱 안에서 나오지 못하던 모피들이 온통 쫓아나와 활개 치는 것을 본다. 옷이야 많아도 입고 나갈 옷은 보이지 않는다더니. 또래들 사이에서 기나 죽지 않았는지. 입고 싶은 옷을 구한 아이가 입을 헤벌린다. 내친 김에 대동하고 남대문시장까지 걸었다. 볼일도 보고 끼니도 해결할 겸해서. 가는 길에 이런저런 화제를 던지며 반응도 본다. 건성으로 넘기던 녀석이 눈빛도 반짝이며 호기심을 보이는 품이 제법이어서 새삼 말이 많아진다. 늘 눈만 부라릴 줄 알았던 제 아빠 수다가 새삼스러운지 눈치를 보는 녀석. 지난 기억을 있는 대로 쏟아내기만 하려는 나도 벌써 외로움이 몸에 배인 걸까.













Sweet Dreams And Starlight * David Nev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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