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각에 맞춰 오겠다는 친구, 더러 마주하여 시시껄렁한 얘기라도 나누는 사이기에 마다 할 이유가 없다. 헌데 진창길 차가 밀린다며 문자메시지만 거듭 날리더니 결국 전화한다. 늦을지 모르니 늘 가는 시장 선술집에 가 있으라고. 바로 답해야 하지만 막 실갱이를 시작한 참이다.
마감에 가져온 표지 사진이 영 못마땅하다. 고심하는데 어랏, 이건 또 뭐야? 표제어라고 놓은 제목이 '고고씽'이라니. 아무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말을 쓴 거라지만 이럴 수야 없다. 고리타분한 잣대를 갖다 대 따지는 내 잘못일까. 갸웃거리다가 머리를 흔든다. 명색이 바른 글과 적확한 문장으로 먹고 사는 주제에 말야. 사진부 팀장을 불러서는 느글느글함부터 쫓고, 타이틀 담당도 혼줄내고, 내친 김에 시원찮은 내용 부분까지 들춰내서는 악을 버럭버럭 쓴다.
언어파괴의 주범이 누굽니까? 대강대강 만든 걸 누가 좋아합니까? 아침 출근 전까지 다시 만들어와요.
속이야 후련하지만 갈증 난다. 창 밖 겨울비에 종일 젖은 어렴풋한 세상을 본다.
'아차, 이 친구 도착한 지 한참 되었겠는 걸.'
헐레벌떡 간 선술집 홀엔 친구 혼자 등을 보이고 있다. 살랑대는 이쁘장한 주인장 대신 늙다리 노인장은 열두 번을 불러야 마지못해 밍기적거린다. 왜 심통인지 몰라 친구와 수군거린다. 탁주가 주둥이로 튀어오르도록 주전자를 던지고 가는데, 워언 참.
"우리가 이르게 술집에 나앉았다고 저러는 건가?"
"살아온 과정이 얼굴에 씌어 있구만. 삶이 오죽 팍팍해야지."
"저 우거지상을 보려고 내가 왔나. 그렇찮아도 위안받고 싶은 참에 말야."
쓴웃음으로 씨근벌떡 달려온 조급함을 대신한다. 잔을 부딛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근데 넌 낯빛이 왜 그래? 볼은 퉁퉁 부어 갖고."
"아, 이거? 한며칠 전부터 이가 아프네."
"이 아픈 데 술을 마셔도 돼? 허긴 통증일랑 지울 수 있겠구나."
아닌 게 아니라, 끙끙거리며 밤잠을 설쳤다. 쫓아간 칫과에선 처방이 모호했다. 아픈 이가 문제가 아니라 멀쩡한 주변 이도 조만간 처치해야 된다는 둥 늘어놓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다가 나왔다. 갈 길은 아득한데 몸은 만신창이니. 시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잠시 글줄이라도 새기고 있으면 흐릿하다.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운동신경이나 자가치유를 행하지 못하는 생체 기능, 새로 바꾼 전자제품 앞에서 어리둥절한 감각 등 늘어 놓을 한탄도 많지만 막상 꺼내자면 생각나지 않는다.
자조에 덧붙여 녀석이 넉두리를 늘어놓는다. 학업을 마치고는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서른 넘어서까지 학원에서 강의로 날 새는 자기 딸아이 얘기랑, 허둥지둥 흘려버린 세월을 주절주절 그려내더니 입가에 묻은 막걸리를 맨손바닥으로 닦아낸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나이만 먹었으니 자책하지 않을 수 있나. 평생 땅이 밥이라고 빌붙어 사는 부모님이 싫어 오밤중 몰래 슬하를 벗어난 일. 당신들이 가신 다음에도 구태여 돌아가지 않고 버텼더니, 인제는 가고 싶어도 가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는 하소연이 줄줄이 꿰어져 나온다. 난마처럼 얽힌 실타래, 끊어버린다고 해결될건가. 불콰하니 술이 올랐다. 나름의 지청구를 날리는 동안에도 척척일 만큼 쏟아진 겨울비. 방금 소리나게 여닫이문을 닫으며 들어선 청춘남녀의 실없는 웃음이 낯설다.
"몇 시나 되었지? 오늘 마쳐야 할 일이 있었는데 까먹었구만. 근데 여기 사람이 많아졌어. 자리를 옮길까?"
이름 그대로 난장이다. 소음이 멀어졌다가는 바로 옆에서 뒤엉키기도 한다. 심각한 친구 낯색을 헤아리며 얼버무리려는데 얼굴 근육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가리킨다.
"너 웃을 줄 모르지?"
남녀노소가 한데 웅성거린다. 저마다 섞여 속에 담은 걸 게워낸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역정을 내거나 식탁을 내려치기도 한다. 선술집 구석에서 숨 죽이고 있던 오래된 시간이 엉덩이를 쳐들고는 들썩거렸다.
Lyphard Melody * Richard Clayd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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