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로 오는 친구 전화. 조심스레 안부인사부터 내려놓고 반응을 살피는 기색이다. 끄덕이는 걸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알아챈다. 우선 이해하라며 당부하고는 늘어놓는 하소연. 시댁 식구들 때문에 속 끓고, 모시고 있는 시아버지도 평생 어렵고, 남편도 애먹이고, 그나마 위안삼던 아이들도 엇나가기만 해 벼랑 끝이다. 정작 본인 건강마저 여의치 않으니. 얘기가 한없이 이어져 막기도 한다. 지금 바쁜 일이 생겨서. 그러면 두말 없이 끊었다가 두어 시간 후 다시 전화기를 연다. 가끔은 벽을 두고 혼잣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것이다. 벽보다는 내가 낫다고 여기는 걸까.
한동안 소식이 뜸하기에 이번에는 내가 궁금하다. 하수상한 시절, 살이가 눈 뜨면 달려드는 사나운 호랑이같이 여겨지는 유부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때릴 수 없어, 주저하던 번호를 하나하나 되뇌며 콕콕 찍는다. 신호음이 어렵게 간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쳤는지 달칵거린다. 가슴이 방망이질한다. 그래도 용케 나야 알아보겠지 싶었는데 반응이 없다. 가만히 귀 댄 전화기에 나직하게 소리를 넣어 보았다.
"여.보.세.요."
대꾸가 없다. 정색하고는 입을 가린 듯 숨이 가빠져 서두르는 소리가 전해진다. 저쪽 풍경은 어떤 것일까. 열어 둔 커튼 사이로 숨어든 오후 햇살이 게으르게 드러눕는 풍경을 본다. 겨울이 저만큼 비킨 계절, 창을 열어 두었는지 부녀자를 모으는 장사치 소리가 한가롭게 난다. 순간 와당탕거리며 수화기가 내동댕이쳐진다. 그리고는 다시 쫓아와서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친다.
"잠깐만, 아버님이."
금방 멀어졌는지 애절한 음성이 전화기 안에서 이어진다.
"아버님, 왜 이러세요."
"야야, 괜찮아. 괘않으니 놔둬."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한다. 대청에서 가부좌를 튼 채 마루를 물들인 노란 햇살을 부여잡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선 영면하신 어른에 대해 담담하게 전한다. 그 후 편해졌는지, 아니면 더욱 나빠져서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는지 이어지지도 않는다. 삶과 죽음으로 갈리지 않더라도 끊어질 수도 있는 사람과의 관계.
"스님, 불 들어가요."
거화가 될 때 지켜보던 이들에게서 소요가 인다. 조금씩 오열하며 늘어뜨린 주먹을 불끈 쥔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단발마를 내지르는 이도 있다. 가라앉은 하늘. 바람이 뭉치며 일어서자 숲이 들썩들썩한다. 어릴 적 시골집 아궁이는 이런 날, 허기진 듯 태우던 잔솔가지 불길을 빨아들였는데. 불이 거세게 올라 연화대가 잡아먹힌다. 발화점을 넘어선 지 이미 한참, 웅성거림을 장작삼아 울음이 터진다. 누군가 소리친다. 불이 났다며 그만 일어나시라는 야단법석도 인다. 다시 피어 날 것이라더니. 화중생연을 바라는 염불이 점점 커진다. 평소 입버릇처럼 외던 수타니파타Sutta-nipata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홀연히 가진 어른.
데운 공기가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동토가 갈라지며 숨길이 트였다. 메마른 가지들이 몽글거리며 움을 틔운다.
이번에 덕수 이씨네에서 부두를 면한 공터에 가게를 하나 냈다. 주변을 고르고 정리하는데 당최 진척이 있어야지. 조금 전까지도 간섭하던 어른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것저것 들쑤시다가 휑하니 들어가버렸다.
"쎄기 끝내뿌리라는데. 바람이 을매나 센지 눈을 뜰 수 있어야제. 여게만 칠함 되지예?"
세상을 다 칠하지 않아도 흡족한, 고달픈 인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John Williams, Theme from Schindler's List
Solo Trombone, Don Lucas & Piano, John Hendric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