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오른다는 게 예삿일인가. 더구나 그 자리를 지키려면 얼마나 처절한 각고의 노력을 쏟아야 할까. 베이징 올림픽에서 각각 남녀 단체전 금메달을 따낸 장한 우리나라 양궁 선수들. 알다시피 양궁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경기이다. 그러다보니 진작 세계 각국 선수의 견제는 물론 중국 관중의 방해를 예상했다. 이에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도 활을 쏜다. 또, 호루라기 소리나 온갖 종류의 소음을 틀어 놓고 과녁에 화살을 명중시키는 피나는 연습을 반복했다고 한다.
LPGA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리나라 낭자군. 그 중에서도 신지애 선수의 손바닥 사진이 공개된 적이 있다. 짧고 투박한 손아귀와 굳은살이 잔뜩 배인 손바닥. 스물한살 꽃다운 처녀의 손이라고 선뜻 내놓기에는 어려운, 그 손은 하나의 목표점을 향하여 불철주야 노력한 과정의 극히 일부분만을 드러낼 뿐이다.
사월 중,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갈라-더 발레.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최신작과 함께 마흔세 살 발레리너 강수진이 무대에 오른다. 최고가 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산물을 단순히 눈물의 양으로만 가늠할 수 있을까. 강수진의 발도 성하지 않다. 발톱마다 꺼멓게 죽거나 망가지고 그 아래 피가 배인 것은 예사, 발가락 뼈마디 사이는 상처로 패어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까진 살 위에 생고기를 덮고 발레슈즈를 신었다는 고행담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진식이는 키가 껑충하고 덩치가 크지만 눈이 선한 후배이다. 우리 중대에서 빤히 내려다 보이는 의장대 소속이었는데, 날마다 내무반 뒤쪽에서 얼차례를 당하느라 구령이 그치질 않는다. 쉬는 시간도 아깝다. 총신이 긴 엠원을 돌리고 절도 있게 던지거나 받는 연습에 열중이다. 다림질로 바지나 웃옷 줄을 칼처럼 세우고, 철모나 버클에 광을 내고, 구두 등을 반짝거리도록 닦아 두어야 한다. 귀빈이 오면 공항 등에 가장 먼저 나가 의장행사를 치른다. 사열이나 행사는 오직 이삼 분, 이를 무리 없이 처리하기 위해 밥을 먹거나 잠잘 때나 심지어는 암흑 속 동초를 서면서도 총 돌리기를 습관화한다. 자칫 행사에서 총을 떨어뜨리는 등 실수하면 모든 게 끝나기 때문에. 지나고 나면 허무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오직 한 번을 위해 바치는 열정을 주변에서 찾다보면 의외로 많다.
원단에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는 친구. 어제나 오늘, 내일 뜨는 해가 다르지 않건만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가타부타할 수 없다. 심지어는 일출을 보고 해를 따라 서쪽으로 가 일몰까지 보고 왔다는 데에야. 겨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래 삼아 섬진강 매화타령을 하더니 두어 주 전 기터이 달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일생에 오직 한 번의 생을 위해 꽃을 피운다지만 아름다움을 즐기러 그렇게 해야만 하나라고 의문을 표하면 이상하다. 사실 나도 어느 때에는 마찬가지로 상춘객에 섞여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다닌 적이 있기에. 사는 게 한낱 말로 재단되어질 수 없는 터. 다들 주어진 그 때 그 자리에서 살이에 열중하며 온힘을 다해야 한다.
虎視眈眈을 호시침침으로 읽어 식자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던 양반, 문인들을 위한 저녁 만찬에선 未堂 서정주님을 은근히 불렀다. '말당 선생~' 하면서. 확인할 길은 없다. 어쩌면 우스갯소리에 불과한지도.
출발할 때부터 두근거리는 가슴. 오래 된 것을 찾아가는 길은 괜히 눈물겹다. 꼭 두고 온 옛 처자를 찾아가는 것처럼. 봄이 오락가락하는 통에 쾌청함은 없다. 와중에 들른 선운사. 선생의 詩句처럼 동백꽃은 일러 피지 않았다. 다들 투덜거렸지만 그게 오히려 좋다. 대웅전 앞 맨 가지로 버틴 배롱나무가 비스듬한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적요의 산사를 거니는 일 또한 낯설지 않다.
다음 번에 남녘 지심도까지 허적허적 달려갔을 때엔 동백나무에 용감한 꽃은 지고 게으르고 병색 완연한 꽃들만 겨우 달려 있었다. 꽃이 내게 정향定向되어질 리는 만무하다. 꼭 꽃이 만발할 적 달려가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렇게 마음속에 담아 꽃을 피우거나 재울 수 있다면 그도 행복한 일이다.
Sacrifice(Piano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