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인가 싶어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유난히 더딘 봄. 조바심을 낸다. 이러다가 봄 없이 여름이 들이닥치겠는걸. 아니야, 여름이면 어떻고 가을이면 어때. 코웃음도 친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움직임을 멈춘 아내. 똑똑 떨어지던 수돗물이 내민 손가락에서 부숴뜨려진다. 내버려둘 수도 있지만 멈춰버린 시간이 길어진다. '험험', 괜히 소리를 내자 따라 나오는 한숨. 훌쩍 떠나 사막에나 있고 싶다나. 그저 막막함과 맞닥뜨리기를 바라는가. 무료함이 뱀처럼, 숙명처럼 몸에 감기면 그 다음에는 어떡할런지. 어린왕자도 아니고, 몽환적으로 그리는 세상이 주는 위안이라면 내 생각으로는 감감하다.
억지로 사막에 서지 않고도 나는 늘 허무감을 안고 산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사랑채 앞 두엄처럼 쌓여 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초당에 기거하는 머슴처럼 일어나기만 하면 열일 제쳐두고 아래쪽부터 걷어낸다. 지게에 퍼담아 종일 날라야 하지 않을까. 앞뒤 텃밭에라도 골고루 뿌려야지. 눈코 분간할 수 없는 중에 연락을 받았다. 두엄더미를 보며 질리던 참이다. 쟁기나 쇠스랑을 내팽개치고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상암역으로 달려간다.
혹시 공기중 감정홀씨가 떠도는 게 아닐까. 홀씨가 천착되면 별안간 우울해지거나 활짝 웃으며 피어나기도 하는 사람들. 식물학자 이상으로 풀에 대하여, 나무에 대하여 해박함을 드러내는 Mrs. O[ou:]. 일별하며 단순하게 구별하는 나와는 달리 세심하게 살펴 뿌리가 어떻게 다른지, 잎의 돌려나기나 줄기가 벋는 곳의 차잇점을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다. 슬쩍 훔쳐 본 글귀에서는 자기도 알 수 없는 게 있다고 했다. 무심한 듯 내다보는, 하지만 늘 품안에 가두어 두는 남편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다나.
오는 자체가 홀씨인듯 떠돌다가 밝은 웃음으로 맞는다. 바깥 햇볕이 따갑다 못해 질기다. 그래서 양복 웃도리는 아예 팔에 걸고 슬슬 따라간다. 하늘공원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꺾이는 자리마다에서 보이는 풀 나부랑이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곁들인다. 새겨들어야지. 똑같은 종이 나오면 물어 보고 확인할 게다. 지나는 사람들이 생경하게 쳐다본다. 드디어 하늘공원에 올라섰다. 고추잠자리가 온통 하늘을 덮고 맴돈다. 마침 축제를 위한 억새가 재배되는 중이다. 오늘 조우는 단순한 게 아니다. 억새를 보러 문득 오른 오. 억새밭 안에서 묘한 걸 발견했다. 엽록소가 없어 억새나 생강에 기생하는 야고. 야고는 제주도 특산이다. 이를 미루어 여기 억새야말로 제주산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때 헛헛함을 느끼게 하는 홀씨를 안았을까. 이를 지우려고 트인 세상에 올랐다가는 찾아냈겠지. 신기한 발견을 담아 두고 지나칠 수 없다. 나를 데리고는 들어가지 말라고 쳐둔 밧줄을 두말없이 넘어 들어간다. 설마하며 멈칫하는 내게 손짓을 한다. 계면쩍어 두리번거리며 들어갔다. 빽빽한 억새를 하루살이 쫓듯 두 손으로 원을 그려 몇 차례나 들췄다. 이거야 원, 느닷없는 소나기에 피할 움집이듯 도톰해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사방을 헤집는다. 새삼 여느 때와 다르게 투피스 양장을 차려 입고 온 오를 보았다. 말려 올라간 윗도리 아래 허여멀쑥한 맨살이 보인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찔한 모습에 낯이 화끈한다. 이에 아랑곳 없이 덤불 안에서 찾아낸 야고를 가리키며 오는 웃음을 머금고 나를 본다. 땀이 삐질거려 맨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과연. 디카가 어디 있지. 이런 급하게 나오느라 두고 왔나 보네. 눈에만 담고 일어선다.
허겁지겁 나오는 데 공원 관리인을 앞세운 일단의 무리가 저만큼 온다. 억새밭 안에서 남녀 둘이서 왜 나오는지 알고 있다는 듯 지나면서 빙그레 웃는다. 물어보면 변명이라도 할텐데, 듣지도 않고. 벌겋게 달아오른 판국에 날은 더워서 땀이 그치지 않는다.
야고 줄기는 짧아 땅 위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여름 말미 줄기에서 나온 긴 꽃자루에 연한 자주색 꽃이 달리는 일년생 기생식물로, 뱀에 물렸을 때 청혈해독작용이 있어 사용하나 야고 자체에 독이 있어 유의해야 한다.
Baila Verena * Potsch Potsch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