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아마도

*garden 2010. 5. 4. 11:06




삼삼오오 모여 얘기에 열중하면서도 바깥 동정을 살피는 사람들. 웅성거림을 스피커 음이 휘젓는다. 왕왕거리는 소리가 그치자 금방 잡담이 커졌다. 엉킨 소음을 분간해내거나 알아 듣지 못해 귀를 쫑긋 세운 사람들조차 난감한 표정이다.
"뭔 말이래?"
"글씨, 안즉 배가 떠나지 못한다는 소리겠지."


저마다의 짐을 끌어안은 사람들로 빼곡한 대합실 의자. 추이를 살피려고 고개 든 여자가 눈을 내리깐다. 뜨개질을 멈춘 참이다. 무릎에 얹었던 왼손가락을 들어 감긴 실을 조였다. 작은돌기만 있는 코바늘이 눈 없이도 반대편에서 다가들어 익숙하게 감고 휘돌려 다시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늘어뜨린 레이스가 조금씩 코를 늘여간다. 앞에서 팔장을 낀 여자가 유난하게 '짝-짝-' 소리가 나게 껌을 씹었다. 유모차에서 바깥에 눈을 두던 아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엄지발가락을 입에 문다. 수면에 이는 파문처럼 소란은 한때일 뿐, 금방 사그라든다. 다들 머물러 있는 곳이 따로 있다. 해가 떠도 가시지 않는 안개. 목이 잠기고 눈에 백태가 끼인 듯 답답하다. 바다쪽에서 날아드는 기적. 아침나절, 떠날 작정을 하자 설레임에 서둘러 달려왔건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발이 묶인 연안부두에 주저앉은 배와 사람, 두리뭉실한 시간이 지루하다.
"이러다가 오늘 출발을 못하면 어떡해?"
"에이, 그렇기야 할라구. 해가 쨍쨍거리면 금방 안개가 걷힐텐데."
손전화로 게임에 열중하느라 저마다 어깨를 움찔거리던 커플이 쫑알댄다.
"근데 오늘따라 왠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몰려간대?
아마도~ 기회를 놓치면 영영 못간다고 생각허는 거겠지?"


말이 속에 있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입밖에 쫓아나오자 섬뜩하다.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래도 다들 떠나겠다고 아우성일까. 돌아오지 못한대도 꼭 가자고 하면 어떨까. 머리를 흔든다. 설마하니 그럴 일이야 없을거야. 게임이 종료되어 새로운 시작을 누르며 손을 바쁘게 움직인다. 이것저것 끄집어내다 보면 생각이 엉클어져 감당해내기 힘들다. 나중 일은 떠올리지 말자. 바람에 묻어 갯비린내가 뭉텅뭉텅 들어온다. 낡은 대합실에서 이렇게 오래도록 무료하게 버티고 있어야 한다고 예단이라도 해봤던가. 바깥에 나가도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아무 데나 들쑤신다.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북적대던 구내매점이 비로소 한산해졌다. 노인네 서넛이 얼굴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며 막 박카스 병을 기울여 내용물을 털어 넣는다. 개중 한 사람이 구레나룻에 묻은 단맛을 음미한다. 매점 여자가 무심하게 대합실쪽을 본다. 사람들 사이로 조무래기 둘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학교에서 운동화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교실 구석구석을 다 뒤지고도 나오지 않는 운동화. 누가 신고 갔다면 다른 신발이라도 한 켤레 남아야 할텐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갖다 준 커다란 슬리퍼를 끌고 늦게서야 집에 갔다. 다음 날 다른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다. 한 반 친구들이 공주 만화그림이 있는 운동화를 부럽게 바라본다. 수업을 마치고 쓰레기통을 비우러 갔던 남자아이들이 소각장에서 찢긴 운동화를 찾아왔지만 그걸 다시 신을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새 신발을 신고 방방대던 마음으로, 먼길을 떠나와선 이곳에 섰다. 앞서의 손이 따뜻하던 매점 아주머니는 그렇찮아도 떠나고 싶은 참이었는지, 서둘러 여기를 건네고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다음 날 훌쩍 사라져 버렸다. 대신 물때가 되면 들고나는 바다처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버틴 세월. 코를 벌름이며 냄새를 맡는다. 새삼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만 버렸던 그 운동화라도 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나도 길을 나설 수 있을 텐데.











Eros * Chris Spheeris





'不平則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풀어라, 오월의 숲이여  (0) 2010.05.13
사는 일  (0) 2010.05.10
자리잡기  (0) 2010.04.27
지금 어디요  (0) 2010.04.15
술래는 봄  (0) 2010.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