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급을 다투는 원고에 매달린 적이 있다. 휴일 밤낮을 꼬박 붙어 삼십여 매를 처리한다. 참고자료나 내용을 뒤지며 원고지 칸을 메꾸느라 눈은 충혈되고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배고 목과 어깨는 뻐근하다. 날려 쓴 글자가 삐뚤빼뚤해 알아볼 수 있을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마치자 날아갈 듯하다. 쪽당 고료가 이만 원씩이니 육칠십만 원이나 되는 공돈이 생긴다. 극에 달한 피곤을 새우잠으로 지우려면서도 머릿속은 돈 쓸 궁리에 바쁘다. 가만, 이렇게 원고만 써도 수입이 그야말로 엄청나겠군. 일년 내내 바짝 노력한다면. 때로 몽상도 즐겁다. 현실이 팍팍한 탓일까.
직시하자면 줄곧 원고만 써댈 수도 없으며 그런 식으로 소용될 원고거리도 없다. 와중에 하루벌이가 그만큼이었으니 그 자체로 스스로에게 대견하고, 일을 해결했으니 어깨 짐이 덜어져 좋고, 가욋수입까지 챙겨서 흡족하다. 연신 웃음을 지우지 못한다.
사람이 여든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얼추 잠자는 시간이 26년 남짓 된다. 일에 매진하는 시간은 이보다 적지 않을까. 노는 시간을 따지면 8년 정도. 음식을 먹는 시간이 7년 정도이다. 약속 등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도 3년 반이나 된다. 이렇게 단순산술식으로 따지면 분노하거나 다툼 등에 허비하는 시간도 상당할 것이고, 요즘처럼 여기저기 손전화를 들고 있는 양을 보노라면 통화 시간이야말로 입을 벌릴 만큼 늘어날 것이다. 전화야 꼭 필요한 때 하는 것이라고 알던 나로서는 가끔 사무실에서도 당황스러운 적이 있다. 전화 업무가 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쉴새없이 여기저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대여섯 번 뒤풀이될 때까지 그냥 두지를 않나. 속을 들여다 보면 제 자식이 귀엽다고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갓난아이를 바꾸라고 해서는 한참을 얼르는 꼴이라니. 이동식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을 적이다. 일을 제쳐두고 전화상으로 노닥거리는 직원이 눈꼴시렵다. 전할 말이 있어 눈길을 주는데, 눈치도 없는 사람. 지난 저녁 방영한 연속극을 재생하는지, 시시콜콜 늘어놓다가 했던 말도 되풀이하고, 참을 수 없다. 엉거주춤 이름을 부르니, 전화를 끊지 못한 채 흘끗 쳐다보는 눈초리에 더 마음이 상한다. 정도껏 해요. 진작 온 사무실 사람이 은근히 주시하는 판국에 가라앉은 한마디로 사방이 얼어붙었다. 어른이 입에 달던 말처럼 나물날 곳은 초봄에 알아본다고, 그 직원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심지어는 내 주변에도 통화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이가 적지 않다. 정작 긴요한 일이 있어 전화를 내면 단번에 연결되는 적이 드물 정도로. 한참 후 다시 해도 역시 뚜-뚜-거리는 소리를 귀에 대고 있어야만 하니. 용케 신호가 맞아 떨어지면 기다렸다는 듯 통화에 열중한다. 이런저런 화제를 대두시켜 한숨을 쉬거나 깔깔거리며 울고 웃는다. 그러다가 다른 전화가 왔는지, 일방적 양해를 구하고는 허겁지겁 쫓아가는 모양새를 보인다. 전화기 저쪽에서 구시렁거리는 말이 드문드문 들리는 데에도 고치가 실을 풀어내듯 끊임없이 다른 세상을 꺼낸다. 소통이 수동적이어서일까, 가급적 맞닥뜨리는 현실보다는 몇 발자국 떨어져 세상을 대하고 싶은 건지.
히브리어로 연구나 배움이란 뜻의 구전율법모음인 탈무드 תלמוד 에 동물 행태에 비견한 남자 일생 구분이 나온다. 결혼하면 가정이라는 굴레를 위해 애쓰는 당나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구걸도 불사하는 개같은 중년, 노년은 그야말로 어린아이와 다름 없음에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원숭이라고 했다. 나야말로 개로 사는건가, 아니면 원숭이 축에 드는가.
오늘도 사람 모인 자리에서도 불구하고 영낙없이 왕왕거리는 아주머니들 억센 목소리. 누가 있어 찡그리거나 말거나 알 바 없다.
이넘 지지배, 왜 꼭 내가 연락해야 하니? 응, 그래서.....어머어머, 그럼 그날 오는거지?.....응, 응, 어머머, 어째어째. 그렇게 끔찍해서 인제 누가 애를 군대 보낼려구 하겠냐고.
듣다 말고 나도 움찔한다. 바지 주머니에 찔러 둔 손전화기가 부르르 떨린다. 전화기를 열자 말자 쏟아지는 말말말.
지금 어디에요? 아직 거기 있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