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인세대'니 '쉰세대'니 '저주받은 세대'라는 말 등을 접한다. 말은 어법에 따라 말로서의 정의가 내려져야 가치를 지니지만 요즘엔 확장된 미디어 탓인지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쉽게 퍼뜨려진다. '말이 말 같지 않아 흘려 들으면 되지' 하고 지나치기엔 듣는 빈도가 잦아 새삼 되삭일 정도로. '우리 대에 왜 이럴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등의 자조도 뒤따른다. 모듬사회에서 벗어나 일상이 개인화되면서 뜻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에 따른 상대적 비교로 박탈감이 심해진 탓도 있다. 날로 치열해지는 삶에 회의가 드는 건 너나가 따로 없지 않은가. 지난 일을 돌아보며 주춤거리다 보면 어느새 뒤쳐지는 감을 지울 수 없어 초조하다. 그렇다고 기대거나 한탄할 데도 없으니.
이왕 시작했으니 몇 마디 더 덧붙이자. 삶이 팍팍하거나 무미건조할 적이 아니라도 가끔 망상을 이어가게 된다. '한 이십 년 일찍 살았더라면', 아니면 '이십 년 정도 지난 후에 태어났더라면' 하고서. 주어진 삶을 영위하는 것보다 시기라도 선택하여 살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할까. 누군가는 작정할 것이다. 난 다투는 게 싫으니 전쟁이 있었던 이즈음을 피해 살 거야.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과거나 미래를 나다니는 시간여행자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마음먹은 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운명을, 결국 거슬리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주인공처럼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선택해 채우는 삶의 모양새가 마냥 좋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고민한다고 답이 생기지도 않지만, 삶이 유한하기에 떠올리는 끝은 과연 어떨가를 떠올리면 막막하다. '소멸 후 다음 생은 과연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등의 의문이 그치지 않는다. 한달 후에는, 아니 일년 후에는 '내가 어디서 어떤 생각의 자취나마 흔적으로 남아 있기나 할 것인가' 등의 가당찮은 생각으로 소일하는 지금도 나중에는 하릴없어질 것이다.
이른 봄부터 헤집고 다닌 흙. 땅 위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축복처럼 깨어나던 풀꽃에서 느끼던 생의 환희에서 헤어날 줄 몰랐는데, 눈을 뜨자 여름이다. 이미 생기가 짙어 교목이나 관목에도 싹이 돋아 땅 위에 그늘을 지운다. 조만간 낮은 곳에서 방글거리던 제비꽃 등은 뿌리마저 흔적 없이 사그라들게다. 그래도 내년 그 자리를 다시 기억하고선 쫓아나오겠지. 시선을 들어 올려다 본다. 눈길 주지 않는 와중에도 끊임없는 아우성은 삶이 순차적일 수밖에 없다고 여긴 내 짧은 식견을 비웃는 것 같아 종종 실소를 한다.
In the Year 2525 * Franck Pourc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