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봄날은 간다

*garden 2010. 5. 27. 18:00




학교 담장을 따라 걸었다. 늘어선 나무들마다 기지개를 하듯 벋은 팔에 제법 힘이 들었다. 유록색 옷까지 의연하게 걸쳤으니. 순식간에 사방 정경이 바뀌었다. 화사하던 꽃은 어디로 갔는가. 숨을 들이킨다. 쟁강거리며 떠도는 싱그러운 향. 손바닥을 펴든다. 간들간들한 햇살이 얹혀 소란을 떤다. 이파리에 퉁그러졌다가 내린 햇살은 연두색을 담고, 운동장을 지나 온 햇살은 황톳빛을 띠며, 강을 건넌 햇살은 물빛을 담았다. 어지러워 한손으로 담장을 짚었다. 저기쯤 우뚝한 건물뿐이어도 여긴 제법 하늘이 열려 있다. 흥이 났다.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끄집어냈다. 어릴 적 동산에 올라 부르던 동요를 생각해낸다. 또박또박 가사를 새기며 한소절을 넘기기도 전에 깜짝 놀랐다. 서너 걸음 앞에서 누군가 쳐다보고 있잖은가. 건들거리는 내 모습이 익살스러워 보이는지, 단정한 차림의 아주머니가 입을 가렸다. 휘파람을 삼키고 자세를 다듬었다. 무의식중에 다리가 휘청한다. 조심스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주던 흑백이 분명한 눈이 깜박거린다. 까닭없는 목례를 받으며 가슴이 쿵쾅거린다. 웃음이 봄날 꽃처럼 솟아 주변을 휘감고 돌아간다. 이상하다. 굳은 표정이 뻔하건만 왜 우리가 웃는 것처럼 여겨지는지. 가만, 낯익은 얼굴인가. 아닌데. 근방 어디서 마주친 적이 있던가. 그런 적도 없다. 그래도 군더더기 하나 없이 이리 평안하게 마음이 놓이다니. 풋풋한 향기가 사방을 덮었다. 섬을 놓고 맴도는 전마선이 물결 이랑을 만들듯, 조명 환한 무대에서 한팔을 마주 깍지끼고 춤을 추며 돌아가듯 엇갈리는데, 문득 머릿속이 비어 버린 듯하다. 한 생이 끝나버렸다. 뒤켠에서 그리움이 자락으로 엉켜 맴돈다. 돌아볼 수도 없이 허적허적 나아가는 걸음에 묻어나는 외로움이라니.


텅 빈 거실에서 텔레비전이 저 혼자 웽웽거릴 때,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일어섰다. 웃도리를 주섬주섬 챙기고선 내려갔다. 소주라도 한 병 사 와야지. 각진 아파트 시멘트 보도를 걸어갈 때 나를 따라 오던 발자국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았다.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두고 갔는지, 쭈그러진 축구공을 냅다 차보았다. 기계실인가, 막막하게 버틴 벽을 박차고는 공이 떼구르르 굴러 쥐똥나무 울타리에 끼었다. 성에 차지 않아 삐죽거리는 아이처럼 어쩌지 못하는 심술. 검은비닐 봉다리에 숨긴 소줏병을 이웃 시선에라도 들키지 않으려고 둘둘 말아 겨드랑이에 꼈다. 훌쩍 올라가버린 승강기가 내려올 동안 쉰여덟까지 세었다. 알게 모르게 입을 가리고 웃던 커다란 눈을 성큼 떠올렸다.


북한산 비봉 아래 자리한 삼지봉. 작은 비봉이라고도 한다. 향로봉에서 비봉을 거쳐 삼지봉을 안고 내려오는 가파른 산길을 더듬다 보면 마애불이 있는 구 원통사 절터에 다다른다. 좁은 계곡에 회의를 하듯 원으로 솟은 아름드리 산벚나무가 장관인데, 늦은 봄날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그리움처럼 쏟아지던 꽃비를 떠올렸다. 늘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이번 봄에는 걸음을 하지 못했다. 내일이라도 배낭을 챙기자. 나서봐야지.














Euphoria * Kooz






'不平則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미의 이름으로   (0) 2010.06.08
거기, 숲에서  (0) 2010.06.04
소리 없는 아우성  (0) 2010.05.26
말의 부재  (0) 2010.05.18
부풀어라, 오월의 숲이여  (0) 2010.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