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장미의 이름으로

*garden 2010. 6. 8. 17:02




종현아, 장미 꽃다발을 든 네가 들어서자 여자 친구들이 환호성을 냈잖아. 그래도 그렇지, 이 눈치 없는 녀석아. 네 집사람한테 가려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 모임일지라도 지나치던가. 억지로 들렀으면 식당 카운터에라도 꽃다발을 슬쩍 맡겨 두고 왔어야지, 그게 뭐냐? 물론 이제까지 아내에게 꽃다발을 선물한 적이 없다는 네 말을 이해야 한다만, 그 때문에 만남의 자리가 자칫 어색해진 걸 봤잖느냐. 네 칠칠치 못한 행동으로 일시나마 마음이 달아올랐을 여자애들은 어떡하며, 옆에 앉은 우리야 욕 먹어 애면글면 속을 끓여댔으니. 누군 꽃다발을 못사서 안가지고 들어가는 것처럼 말야. 안절부절하다가 이도저도 변명 못하고 나가는 네를 보며 다들 웃었다. 허나 부끄러워 할 것도 없다. 한편으로는 되짚어 볼 게다. 꽃다발을 매개체로 그 저녁 행복이라는 공을 굴렸을 너희 부부가 부럽기도 하다.


기회를 빌어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 거 왜, 알다시피 내가 CC 아니냐. 그게 우연히 만들어졌겠느냐. 알게모르게 땀 삐질거리며 발품을 팔아 사정한 결과라면 믿을 수 있겠니? 바야흐로 신록이 천착되는 유월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학교에 가다 말고는 슬쩍 모심기 판에 끼어들어 한나절 애쓰고는 얻어 먹던 농주. 털털한 그 맛을 음미하며 나무 그늘에서 노곤한 잠에 빠져들던 기억. 너희들이 무심간에 입맛을 다시며 날파리를 좇을 때 나야말로 부리나케 일어나 학교엘 갔지. 도서관으로, 강의실로 지금 아내를 찾아다니지 않았겠냐. 학교에서 아내 집이 좀 멀었냐. 버스를 두어 번이나 갈아타고서도 십여 분이나 걸어 들어가는 먼길이 그때는 왜 그렇게 아쉬웠는지. 팔에 낀 두꺼운 교재랑 책가방을 억지로 뺏어 들어주기 일쑤였는데, 그걸 받아 든 아내가 긴머리를 찰랑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은 아직도 기억을 들출 때마다 쫓아나온다. 초인종을 누르고는 돌아보며 어서 가라고 손짓하던 아내. 담장 그늘에 숨어 봐야만 하는 내 처지가 어찌나 서글프고 곤혹스럽던지. 열린 철대문을 따라 내 마음속 지짓대도 끼익대고 철컥거렸지. 입 벌린 어둠이 나는 정녕 싫은 데에도, 마다하지 않고 사라지던 아내. 종종걸음이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었다. 청자 담배 한개피를 빼물고선 이층 아내 방에 불이 켜질 때까지. 높은 담장을 따라 키재기하듯 오르던 줄장미. 아침이면 아내 맨발을 기웃거릴 꽃이 부러웠다. 담홍색 벽돌담장을 따라 눈길 주던 곳마다 벙긋벙긋 향을 토하던 장미. 신경질적으로 훅~ 내뿜던 담배 연기 때문에라도 바로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비로소 함께 있게 된 아내. 생활은 소꿉장난처럼 알콩달콩 이끌어지지 않았다. 사업이랍시고 벌이다가는 번번히 실패하고 수습하러 뛰어다니느라 이번에는이번에는 하다가 어른들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아니, 애시당초 발길을 끊었기에 새삼스레 걸음하기도 어려웠지. 사람을 훔쳐오기도 힘들었지만 훔쳐온 다음에도 왜 늘 힘에 부치든지. 해마다 유월이 열릴 적이면 길게 늘어서 있던 처가 담장과 엄한 장인 어른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생각을 굴린다. 아내도 정말 집에 내려가기 싫었을까. 아무 말 없이 억병으로 취해 들어온 내옷을 벗기고는 이부자리에 뉘던 손길을 기억한다. 발을 간지르며 양말을 벗기다가 메마른 눈물이 가슴팍에 투둑 떨어진 흔적까지.
유월 어느 날에, 나도 장미 한다발을 들고가서는 아내에게 안긴 적이 있다. 새삼스레 눈을 동그렇게 뜨던 사람. 싸아한 향내를 맡고는 꽃병에 꽂아 두더구나. 꽃이 시드는 걸 눈여겨 보았다가는 또 한다발 갖다 안겼다. 이전 꽃다발에 물을 뿌려 식탁 위 벽에 거꾸로 걸어두고 아내는 새 장미꽃을 화병에 가지런히 꽂더라. 말없이 밥을 뜨며 아내 얼굴을 훔쳐 보았다. 어릴 적 자기 집 담장을 오르내리던 유월 뜨거운, 달아오른 장미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눈물겨운 자태를 보며 오래도록 맨밥을 입안에서 굴렸다.


집 안 가득 마른 꽃다발을 걸어두고 인제 아내는 종일토록 베란다에 머문다. 사람이 들어가도 멀뚱멀뚱 볕바라기만 하며 본체만체하니. 행여 내가 싱싱한 꽃다발을 내밀어도 처음 그날처럼 희미한 미소를 띄기는 커녕 받을 줄도 모른다. 기억이 있을 때 벽에 걸어 둔 마른 장미 다발이 조금씩 부서진다. 그게 보기 싫어 걷을라치면 소리치는 아내. 그만, 죄 많은 내가 움찔하며 손을 거둔다. 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때엔 내게 많은 것을 바란지도 모르는 아내. 하지만 이제 내가 이것저것 해주고 싶은 데도 아내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거기 비하면 너야말로 부럽기 그지없다. 종현아, 우리가 언제 낭만을 찾기나 했냐, 그래도 옛생각을 하며 조금씩 되살려 볼 수는 있겠지. 매일 조그만 선물이나 하다못해 그 저녁처럼 꽃다발이라도 장만해 갖고 가려무나. 아내를 웃게 만드는 방법을 잊어 소리 없이 우는 내가 가끔은 넌덜머리나게 싫다.
















Tribute * Y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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