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거기, 숲에서

*garden 2010. 6. 4. 10:47





휴일 다음의 복도는, 흰 페인트 칠을 해 병원 같다. 도료 냄새가 가시지 않아 숨을 참으며 걸음을 뗀다. 가만, 방금 엇갈린 저 여자, 어째 얼굴이 낯익은데 누구더라. 별안간 구슬이 튀듯 환한 인사가 발길을 잡는다. 돌아보는데 눈을 반쯤 감으며 배시시 웃는 얼굴. 얼른 알아채지 못해 어리둥절한다. 대체 장소나 옷이 바뀌면 사람마저 달라져 보이니. 가끔 드나드는 한정식 집 주인인데, 웬일인가 했더니 면담차 들렀다나. 대면할 적마다 유난히 다정한 척하여 당연지사 그런 줄 알았더니, 보통 새침데기가 아니어서 다른 이들에게는 찬바람이 일 정도이다. 한참 전에는 시내에서 만난 적도 있다. 이것 봐요, 보통 인연이 아닌가 부죠. 팔까지 툭 건드리며 깨드득거리는 모습이 흡사 익숙한 사이인양 여겨져 착각이 든다. 혼몽한 이 기분은 뭔가. 근방 황토불가마가 좋아 다녀오는 길이라는데, 복숭아처럼 잘익은 뺨이 눈길을 끈다. 한정식 집에서의 정갈한 아름다움과 마악 목간통에서 빠져나온 건강함과 사무실 복도에서의 청바지 차림의 발랄함을 한데 겹쳐본다. 여자의 변신이 죄가 될 수 없다더니 실감나 눈을 끔벅거린다. 얼마 전 무리를 지어 그 한정식 집에 갔다가는 주인이 바뀐 것을 보았다.


환기차 열어 둔 사무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 선거랍시고 사생결단내듯 왁자지껄하던 소동은 가셨다. 대신에 한가한 햇빛이 들어 부숴지고 또다른 날엔 아래쪽 화단에서 오른 정향나무 향이 은은하다가는 한두 방울 비를 떨구어 주기도 한다.
비 온 다음의 건강한 나무들을 보다가는 머리를 흔든다. 마감일만 되면 다들 죽을 쑤는 표정들이다. 달거리를 할 때처럼 척척하여 안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인 눈빛들. 숨 고르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어느 때 거울 깨지듯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대 스트레스 해소를 해댈지도 모르는 일. 건드리면 터진다. 누군가 손가락 위에서 볼펜을 애꿎게 돌린다. 문장을 웅얼웅얼 씹는 이도 있다. 객관적으로 검토하려니 소리내 읽을 수밖에. 건너편에서 디자이너는 맥 화면에 눈길을 꽂고는 바쁘다. 창을 수십 개나 열어두고는 쿽에서 포토샵으로 갔다가는 다시 일러스트를 부르는 일을 신경질적으로 되풀이한다. 마우스가 콕콕댄다.


눌러 참기만 했다. 하고픈 일이라도 삼가야지. 가장 탈없는 방편으로 위험부담을 줄인다. 그렇게 밋밋한 일상에 스스로를 길들이며 억제한 시간을 어쩌노. 낮은 곳을 향해 스스로를 던져 부숴져선 포말로 존재감을 확인하는 물줄기처럼, 그래서 다른 물줄기로 한데 모여 길을 모색하는 강물 궤적을 찾아보면서, 계절과 계절이 섞이는 것을 본다. 어느 때보다 마음 기울기가 다급하다. 떠날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몽유병 환자처럼 발이 닳도록 헤매고서는 나를 잊고 사는 세상. 아니, 잃었던 나를 찾아 서는 세상이라면. 거기 숲에서 우뚝한 한 그루 나무로 서서 주어지는 만큼의 물과 햇빛으로 웃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가끔은 바람이 전하는 기별을 헤아리며, 어두운 밤마다 별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숲에서 깊이 간직해 둔 이야기를 꺼내 풀어 둘 수는 없는가.

















The Flight Of The Earls
* Phil Coulter





'不平則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음 그대로  (0) 2010.06.15
장미의 이름으로   (0) 2010.06.08
봄날은 간다  (0) 2010.05.27
소리 없는 아우성  (0) 2010.05.26
말의 부재  (0) 2010.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