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 꽃을 지우는 중이라 어느새 너저분한 철쭉. 꽃 닮은 할머니가 기역자로 굽은 허리로 땅만 보고 있다. 이가 듬성듬성한 잇몸을 드러내며 입맛을 다시는데. 아암, 모름지기 사람이란 겸손해야제. 등에 하늘을 인 것만도 모자라는지, 끄는 기역자 리어카에 산더미처럼 쌓아 동앗줄로 꽁꽁 맨 하드보드지들. 오늘은 고물상 장씨에게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두어 장은 받을래나. 그것만이라도 을매나 감사한지. 걸음이 빨라진다. 허나 억지로 끌려가기 싫은 리어카가 길 한가운데서 버텨 요지부동이다.
방금 시장통을 빠져나온 아주머니. 유난히 키가 커 다른 이보다 머리 하나는 위에 있는데, 보따리 하나를 정수리에 얹고, 한손엔 비닐주머니를 불끈 움켜쥐었다. 화창한 날이어서 얇게 걸친 웃옷이 말린다. 드러난 뱃가죽은 의외로 흰데, 젖가리개를 하지 않아 걸을 때마다 늘어진 젖이 출렁댄다. 흔들흔들 까딱까딱, 함께 어울리며 춤추는 머릿짐과 가슴, 그리고 허리. 눈에 띄는 게 있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늦은 점심을 먹다 말고 입가를 훔치며 쫓아나온 꽃집 주인과 고개를 숙이지도 않은 채 시선을 주며 손가락으로 흥정한다. 천 원짜리 서너 장과 맞바꾼 선인장 화분이야 다른 손으로 거뜬히 아귀를 틀어쥔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될 테니, 게으른 우리집에서 키우기 안성맞춤이겠다. 승용차 한 대가 시장 골목으로 머리를 디밀었다가 삐죽삐죽 뒷걸음질쳐 돌아나온다. 말끔한 정장의 신사가 사이드미러를 보며 짜증스럽게 이마를 훔쳤다. 그 옆으로 떠꺼머리 총각 하나가 스칠 듯 오토바이를 끌고 나오더니 중세 기사처럼 척 올라타고서는, 매연을 한바가지나 쏟아내고는 총알같이 내뺀다. 빗자루로 가게 앞을 쓸던 아저씨가 '카악!' 가래를 뱉어 발바닥으로 비빈다. 쌀가게에서 졸던 할아버지가 귀를 쫑긋하며 기지개를 켠다. 목련은 꽃이 지고서도 향기를 품어 주변을 혼곤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푸르른 잎이 요동친다.
뉘엿거리는 오후 햇살을 붙잡고 느티나무 여린 이파리들이 숙성되며 손 흔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침 시장길을 지나올 때 생선상자를 꺼내 가지런히 늘어놓던 아저씨는 습관처럼 입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정육점 앞에선 방금 전 냉동차가 부리고 간 고깃덩이를 걸어두고, 키가 늘씬한 아가씨가 익숙하게 날선 칼로 고기를 저미고 있다. 나무는 꽃의 말을 떨어뜨리고 이제 잎의 말을 준비하고 있다.
저마다의 언어로 소통해야 하는 세상. 어떤 이는 순응의 말을, 또다른 이는 타협의 말을, 누군가는 역린의 말을 내뱉고 싶어 안달이다. 허나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내게도 질풍노도같은 시기가 있었더라니, 어느덧 바람처럼 사그라든 세월. 말도 접고 마음까지 다소곳이 가라앉혀야 하다니.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해서.
La Petite Fille De La Mer * Vangel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