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는 해질녘 산길을 걷는 것 같다. 서두런들 소용 있어야지. 일어서려다가는 앉고, 채근해도 막무가내이고. 얼추 일고여덟 고개를 넘은 것 같은데도 파장으로 드는 길은 감감하다. 종내 남은 술을 엎지르고 너도나도 쑤썩여 흩뜨러진 안주 나부랭이를 집어 질겅질겅 씹던 한 녀석이 일어선다. 한바탕 질펀한 넋두리를 쏟아 좌중을 휘어잡고는 목청을 돋운다. 음율도 없이 떠다니던 소리가 다른 녀석이 운을 보태자 겨우 노래 테가 난다. 와중에도 시끌거리는 한켠.
"이러다간 밤을 새겠구만."
한눈을 찡긋거리자 개중 몇몇이 변명거리를 늘어놓으며 비로소 진정된다. 낭만을 위하여.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어깨짓에 장단을 맞추던 한 녀석이 덧붙인다.
"아, 세월이 고달픈지, 인자 이런 노래가 귀에 쏘옥 든달 말일씨."
혈기를 주체하기 어려웠던 날, 포항 어디에선가 울산 어디에선가의 술집에서 잔을 부딪던 친구 백호.
집에 갈 때에도 노래를 웅얼거리며 깨우는 시절. 나뭇결에 나이테만 그리고서 박제된 줄 알았는데 기억 속에 지난 시간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엉키며 팔을 흔들었다.
여린 생명에겐 감기도 세상을 경험하는 시련이자 과정이다. 걸핏하면 열에 잠식되는 아이가 애처럽다. 입안을 헹구고 닦은 손으로 들춰안았다. 어르는 몸짓에 문어처럼 흔들리다가 실눈을 뜨는 아이, 생기 없어도 흥이 나 겨드랑이를 껴안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동그래진 눈에 시선을 맞추려는데 경기든 것처럼 자지러진다. 아내가 이내 아이를 빼앗아갔다. 머쓱해 돌아보는 길에 자리잡은 건너편 나무 그림자. 아아, 캄캄한 밤. 한겹 어둠을 안고 웅크린 나무 형체가 무서웠는가 보다. 어둠을 받아 먹으며 나무들이 자란다. 가지가 늘어지며 바닥을 슬슬 기었다. 대낮엔 그렇게 미덥던 나무가 밤엔 악귀의 형상처럼 눈을 두기 어렵다. 커다란 팔을 들어 덮치고 달려드는 통에 도무지 나설 수 없다.
말이 난무하는 자리에서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기지 못했다. 하면 할수록 공허한 말. 허나 말하기를 즐기는 이들은 왜 그리 많은지. 현란한 혀 놀림을 보면 감탄스럽기도 하다. 나무의 말을 새긴 적 있었다. 귀 기울이면 이신전심으로 통하던 시절, 세상 이야기가 즐겁기만 했는데. 어느 날 자궁 밖으로 쫓아나오며 잃어버린 전언. 그리고선 혼자 서려고 애쓰던 부단한 몸짓과 사람의 말을 새기려던 노력이 버겁기만 했다. 알게 모르게 멀어진 전생의 기억. 가끔 광에 드는 햇살처럼 간당간당하다가 스러지는 익숙한 기억을 잡으러 손을 내밀기도 한다. 비로소 실감난다.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이 예전 거기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말을 버려야 잊혀진 기억을 일깨울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