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에 우뚝한 성. 금빛 첨탑이 햇빛에 번쩍거렸다. 사방으로 견고한 성벽을 둘러 안팎이 뚜렷하게 구분지어졌다. 똬리 튼 안 세상은 어떤 것인가. 첨탑에 찔린 하늘이 피 흘리는 꿈을 꾼다. 그게 화가 나 주먹으로 담벼락을 쾅쾅 쳤다. 성벽에 짓이겨지다시피해 애꿎은 손등이 너덜너덜하다. 위에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순랏꾼이 소리친다.
"이 우라질 녀석아, 그렇게 할 일이 없냐? 당부하는데 제발 집에 가 발 닦고 자거라이."
빌어먹을 세상. 언제 네 곁에 다가가려고 했더냐? 다짐이 아니라도 세상은 들어앉아 나를 받아들일 기미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부초처럼 너는 그렇게 변방을 떠돌겠지. 붉은 모랫바람이 창궐하는 날, 사구 아래서 절인 미라가 되어 버릴지도 몰라.
문상으로 성내에 들 일이 생겼다. 대표로 한 사람만 가도록 하지. 친구들이 당연하다는 듯 나를 떼밀었다. 자기네들은 얼굴이 알려져 있어 안된다고. 대신 한 번도 성 안에 발을 들인 적 없는 내가 적격이라나. 성 안 구조와 지번에 대해 떠벌이려는 친구 입을 막았다. 평소 머릿속에 그리던 게 있어. 그걸 보고 찾아갈거야.
여기도 이런 곳이 있구나. 가실동597번지는 꼬불꼬불 올라간 산중턱에 있었다. 596번지 다음에 604번지가 나오고, 그다음에는 592번지가 나와 어리둥절한다. 돌고꺾고되돌아 나오고 다시 오르고. 언덕배기에 바람을 만드는 우람한 팽나무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헤매었을지 몰라. 다행히 골목 어귀에서 친구 여동생을 만나 겨우 찾아든 집. 상가라지만 등롱도 걸리지 않았다. 대신 대문 앞 전봇대 위 줄세운 애자에서 '츠잇츠잇 츠츠츠~'하며 쉴새없는 신호음이 교차하여 내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향을 피운다. 카세트를 틀어 놓았는지 독경이 그치지 않았다. 혼이 오르는가, 별빛이 희미하다. 뒤꼍에서 소리를 죽인 울음 소리가 나 갔다가 어둠 속 웅크린 자태를 본다. 기척을 내자 그렁그렁한 눈물을 황급히 감추며 누이가 일어섰다. 배시시 깨문 입가 미소가 차라리 서글프다. 하현으로 가는 달이 깜박 구름 속에 든다.
새벽녘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후덥지근하던 열기가 숨을 죽인다. 장대같은 소나기가 섬광처럼 지난다. 아침 나절 구석진 땅 젖은 흙이 아니었으면 비가 온 사실을 믿지 못할 뻔했다. 후각을 돋워 습습함을 찾아 킁킁거린다. 그렇찮아도 여긴 일일히 구획하고 그 안에 맞추어 넣는 살이가 제격인 성. 지번 없이 뿌리를 내려도 아무렇지 않은, 살던 곳을 떠올린다. 바람은 자유롭고 햇빛은 영롱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 옛날 우리 조상 중 누군가 들이킨 초록 인자야말로 늘 자유롭기를 갈망했지. 영혼만으로라도 떠돌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걸 억눌러 놓았으니 생기마저 온전할까.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빠져나가는 길이 어디 있더라. 야생으로 익숙하던 손발톱일랑 어느새 무뎌져 제풀에 꼼지락거리기만 하고.
Season 1932/33 * Tonci Huljic,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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