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꼬마가 노랑봉지 안에서 꺼낸 가랑코에는 앙증맞은 손을 흔들었다. 가느다란 팔에 띄운 별을 보고 다들 침을 삼켰다. 참, 예쁜 꽃이구나! 하늘의 별이 탁자 위에서 반짝인다. 안타까운 일은 별이 지는 것을 봐야 하는 것. 시름시름 앓는 가랑코에 앞에서 꼬마는 눈물을 글썽인다. 온 힘으로 밀어올려 간신히 터뜨린 꽃이 이리 쉽게 사그라들다니. 오래 간다며 염려말라던 꽃집 주인의 장담은 헛말이 되었다. 대체 '오래'라는 건 얼마만큼일까. 왜 이러냐고 쫓아가 따지면 역정을 낼까, 아님 수긍하며 사과를 할까. 관리를 탓하면서 오히려 뻔뻔스레 호통 치는 건 아닐까. 이도저도 못하는 건, 여기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살면서 체념하는 법도 배웠어야 하는데. 보석같은 꽃을 보며 반색했지만 그때뿐, 인제 더 이상 꽃의 삶 따위에 마음을 두는 이는 없다. 앞날을 기약 못하고 누워 있던 이들이 기댈 수 있을 게 무언가. 사실 여긴 꽃을 들일 수 없다. 벽을 세워 공간을 닫고, 허용된 생기 이외 부적합 요소를 금지시킨다. 하면 안되는 일에 대한 압박을 너도나도 구관조처럼 외워댈 뿐 까닭에 대한 설명은 없다. 시시비비를 가리면 귀찮으니까 관둔다. 소통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처치에 대해서나 날의 향방에 대해 물으면 간호사들이나 의사는 고개를 젖는다. 웃음을 짓지 않는 거야 말할 필요 없고 기껏해야 덧붙이겠지. 기다려보자고. 메말라 기력이 쇠진한 가랑코에 옆에서 머리를 박박 깎은 아주머니가 겨우 실눈을 떴다. 살아오면서 장만한 귀한 금은붙이들 대신에 온몸 가득 연결된 호스와 기기들이 불편하다. 날개라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아. 지금은 어떤 계절인가. 웃음을 터뜨리며 걷던 때가 언제였든지. 지난 봄날 물오른 질척한 논둑길이었던가. 살이 빠져 가뿐해진 몸. 윤기가 없어도 비로소 삶이 맑아졌다. 산소가 필요해. 하지만 더 이상 산소마저 필요없게 되었다.
달려온 손들이 익숙하게 움직인다. 확인과 절차만 뒤따르면 하나의 생이 말끔히 지워졌다. 금방 다른 사람이 침상에 뉘인 채로 옮겨져 온다. 냉장고 안에서 꺼낸 음료수들을 나눠주려 하지만 다들 거부했다. 아직도 채우지 못한 사명을 위해 사신은 곳곳에서 낫을 휘둘러 간당간당한 명줄을 끊으며 돌아다녔다. 이 해 내 내가 45병동에서 잃은 사람이 대체 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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