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렁주렁 달고 있던 호박을 지난 추석 난데없는 물난리에 썩히거나 날려 보내더니, 저놈이 미쳤나. 하루 아침에 꽃을 열두어 송이나 피워낸다. 한편으로는 애닯다. 커다란 잎이 변색하며 오그라드는 통에 식겁하지 않을 수 있어야지. 기온 뚝 떨어진 아침마다 인제는 수정도 못할 꽃을 한다발씩 토해내다니.
불투명한 앞날을 응시하려고 찌푸린 미간을 펼 줄 모르는 사장 앞에서, 휴일에도 출근하고 몇날 며칠 밤 새워 아등바등 채운 사업계획 브리핑을 마쳤다. 그리고는 억겁으로 취했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는 내렸지. 휘청휘청 팔자걸음을 한다. 바람을 잡으러 허적허적 팔을 휘두르기도 한다. 집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자. 이렇게 가다간 내일 아침에도 못닿을걸. 아까 동료들이라도 붙잡아 둘걸. 이야기를 더 나눌걸 그랬나. 누군가에게 생떼라도 쓰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기분이다.
북적이는 전동차에라도 비비고 탔다. 자리에 앉아 무릎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인다.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볼 건 없다. 술 냄새를 진동시키는 것도 못할 짓. 아무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가리라 했는데. 이슥해진 밤, 눈을 감아도 소음은 살아 있다. 사랑을 하는 이들만 깨어 있는 밤. 속삭이고 탐닉해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와중에도 사지가 녹아내려 바닥에 붙는 듯하다. 이런 추태는 안돼. 시선을 들자 맞은편 빨간 가죽구두가 들어온다. 진바지를 따라 오르자 몸통만한 가방일랑 품에 안고 지친 듯 넋 놓고 앉아 있는 여자. 무심코 더듬다가 가만히 가슴을 눌렀다.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콧날, 고집이 배어나는 빨간 입술을 보는 순간 눈에 익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옆자리 아이들이 저희들 세상에서 키득댄다. 늘씬한 키를 따라 커플룩을 차려입고는 손가락을 갈퀴지어 서로를 얽어매었다. 이도 모자라 엠피쓰리를 나란히 한 귀에 연결지어 놓았는데, 남은 손으로 서로를 더듬느라 정신없다. 누가 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가끔 입도 맞추는데.
아서라, 사랑이 너희들만의 전유물이라더냐? 비록 낡고 해져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육신이라고 알지 모르지만 내게도 뜨거운 피가 흐르나니. 그렇게 노골적인 행위를 일삼다니. 아무리 사랑은 맹목적이라지만, 굳이 나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애틋한 기억에 대한 무시이지 않느냐. 비록 못내린 뿌리로 흔들리며 갈지언정 마음 한곳 연정이라도 품지 못할손가. 자다 말고 일어나 한숨을 내쉬던 수 많은 밤은 어쩌다 길 모퉁이를 돌다 흘리고 방치해 버린 사랑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사랑아, 내 사랑아. 이 가을 어디서 울고 있느냐.
Dance of the Clouds * Orig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