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동동 굴러도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느려터진 자동차. 신호마다 발이 묶이고 길은 그리도 막히는지. 약속 장소는 멀고, 시간만 쏜살처럼 내뺀다. 연신 시계를 쳐다봐도 대책 없으니 이를 어떡하나. 이런 줄 알았으면 진작 집을 나서는 건데.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뉘우쳐도, 바짝바짝 타는 입안 침을 삼켜도 소용없다. 늦어도 기다리면 다행이다만 상대가 가버리면 어떡하나. 행여 그럴 리야 없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다면, 하늘이 꺼질 듯한 건 뻔한 노릇.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거나 공간 이동을 해서라도 상대 옆에 터억 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몇 번이나 한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물같이 흘려 버린 시간을 조금이라도 되찾아와 앞에 늘어 놓고 싶을 뿐이다.
시간을 잘게 쪼개거나 거꾸로 되돌리거나 건너뛰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기나 수단의 발달은 날로 눈부시다. 이동통신을 들먹이며 놀라는 건 케케묵은 말씀. 변신을 거듭한 손안의 기기에 모름지기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다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갤럭시S를 가진 친구 녀석이 거들먹댄다. GPS와 Wi-Fi가 달려 있지, Mps나 카메라 기능 있지, 메신저로 늘 원하는 사람과 통화를 할 수 있지 않나, 고화질로 게임이나 동영상을 즐기는 건 물론 워킹토킹까지, 거기에 각종 어플이 무진장하다고.
서비스를 시작했다가 사생활침해 논란으로 중단된 안드로이드 버전 오빠믿지 어플도 있었다. GPS로 검색하는 실시간위치추적 어플이었는데, 이에 대해 서비스 제공사 측에서는 연인이나 남편, 자녀의 안전을 책임진다고 했지만 대다수가 연인 구속의 결정판이라고 조롱했다. 심지어는 이에 대한 방어로 알리바이 어플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 이를 단순히 웃으며 받아들여야만 할까.
어떤 지역의 사진을 검색하는 중이다. 솜씨도 솜씨려니와 조목조목 자상키도 하다. 꼭 찍어야 할 자리에선 놓치지 않는 감각이 돋보인다. 흠, 이건 해가 넘어갈 적 모습이군. 돌아오는 길이 부담스러워 카메라를 꺼내기 힘든 참이었는데. 엇, 이 구석에 있는 들풀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그걸 알 수 있는 건 그날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진 주인의 그 시점 동선을 그리는 건 어렵지 않다. 안으로 들어가 몇몇 게시물을 들추면 이 사람의 선호도와 취향, 잘 먹는 음식까지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또한, 주로 어느 요일에 움직이는지, 어느 계절에는 어디로 가는지 등을 추론해낼 수 있다. 정보화 사회여서 일면 보는이의 입맛에 맞게 게시물이 일목요연해진 점도 있지만 주시하면 움직임이나 위치 파악 등이 용이해진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오죽하면 인터넷을 통한 인적사항이라든지 가족면면, 예전 흔적 들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까. 여행중 멋있는 산의 윤곽을 손전화로 찍는 순간 검색엔진은 이를 알아내 산이름이라든지 높이, 주변 명소 들을 좔좔 읊어댄다. 한편으로는 언제 어디를 경유하여 어디로 가는지 등이 샅샅이 기록되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가끔은 헤매던 자리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는 옆에서 불쑥 묻기도 한다. 도대체 집을 나가선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등에 대하여.
뭘 그렇게 알고 싶소?
몽상일지라도 깨이는 건 싫다. 역정이 나 퉁명스레 내뱉다가도 후회한다. 이런 관심마저 없다면 오랜 기다림을 어떻게 견뎠을까.
해가 스러지는 가을 들녘에서 추념을 잇는다. 아직 온기 남은 맨땅에 누운들 어떠랴. 허나 따뜻한 눈물 한방울이라도 나를 위해 뿌려 줄 이를 떠올리면 괜히 눈물겹다.
Beyond The Sunset * Blackmore's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