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물어 볼까. 틀림없이 우리 아이는 제 아빠보다 늦잠 자는 게 낫다고 떠들지 않을까. 곤한 잠에 빠진 아이를 깨우려다가 말았다. 제 아빠는 이제 시작이라 신발끈을 조여 매어야 한다고 입 벌리면 쏟아 놓는데, 왜 저 녀석은 느긋한 걸까. 그대로 두면 정오를 넘기는 건 물론 저녁까지도 내리 잠자기를 마다하지 않을 참이다. 중앙 난방이라 한 겨울에도 푹푹 찌는 실내 공기. 이불일랑 진작 차 던져 종아리가 드러나 있다. 눈길을 돌려 건너편 커튼을 걷었다. 알싸한 겨울이 지난다. 아침 햇살이 도봉 봉우리들을 쓰다듬었다. 자운봉과 만장봉의 우람한 덩치가 가릴 곳 없다. 희끗희끗한 눈의 흔적마저 황금빛 너울이라도 둘러 그런지 한결 푸근하다. 아이가 여린 웃음 소리를 내며 뒤척인다. 어떤 꿈인지 모르지만 순정한 영혼으로 훨훨 떠올라 누비는 혼곤한 세상이 부럽다.
절벽에서 떨어졌는 데에도 다친 곳 없이 몸이 둥둥 떠다녔어요.
얼음이 깨어지는 바람에 물에 빠졌어요. 근데 젖어도 기분이 좋기만 했어요.
가 본 적 없는 낮선 곳이었지만 당황스럽지 않았어요. 나중에 거짓말처럼 아빠가 절 데리러 오셨잖아요.
눈을 뜨자 말자 사그라진 알록달록하던 꿈을 끄집어 내려고 식탁에서 골몰하기도 하는 아이. 아이들은 자면서 꿈꾸며 자란다더니 그게 참말일까.
눈을 감으면 내 존재는 흔적 없다. 눈을 뜨고서야 내가 나를 확인하는 일도 생뚱맞다. 내 몸이야 당연히 누운 자리에 있었을 테지만, 늘 명징함을 분간하기 좋아하던 정신은 그 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나를 찾지 않는 꿈들 때문에 누워 버리면 훌쩍 건너 뛴 시간이 아뜩하다. 언뜻언뜻 눌리는 가위도 싫다. 그건 사춘기에 진작 없어졌어야 할 증상이지 않은가.
매캐한 냄새로 목이 칼칼하다. 기침을 시작하자 가슴막을 밀어올리는 통증. 미세물질로 혼돈스러운 공기. 구제역마저 바람이나 공기로도 전파된다고 했지. 억지로 짜내지만 허파꽈리에 숨어들었을 이물질의 기억에 몸서리친다. 숨을 쉬자 명치 끝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뜨끔거린다. 여기저기서 암을 말하던데, 드디어 내 몸 안에서도 암 덩어리가 태동하는 건 아닌가. 그것보다도 덩치 큰 꾸러미라도 들라치면 손목이 찌르르하고 어깨를 젖히기도 어려우며 무릎이 덜컥거리기도 하며 한 자리에 서 있을 때면 허리가 뻐근해 견디기 어려운 때가 많다. 주변 누군가는 걸핏하면 병원에 쫓아 가더라만 나야말로 진료를 청한다는 게 어찌 이리 낯선가. 딴은 하릴없는 일에만 몰두했다. 자각 못하는 사이에 꿈이 없어진 것처럼 육신을 갉아먹는 심각한 증상이 획책되지만 이를 모르는 채 눈앞 이익이나 쫓으며 히히덕거리지나 않았는지.
아이의 꿈으로 드러나는 게 현실일 수는 없다. 오히려 현실처럼 덧씌워진 억제된 현실 탈피 욕구여서 더욱 사실적일 게다. 거기에 비하면 나야말로 세상 소속을 당연시하여 꿈일랑 깡그리 뭉개고 사는 게 마땅하다고 여기게 된 건 아닐까. 어느 날 밋밋한 동면에서 깨어 새 날을 맞을 수나 있을런지.
Ofra Harnoy, Norwegian 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