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불장군인 겨울. 그 겨울과 벗한 지 오래인 키다리 아저씨.
홀로 남아 떠올리고 추억하며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래도 내색을 말자. 누가 뭐라던 관심 없다. 자기 안에만 골몰하여 빠져나오지 못하더라도. 배려할 게 없다 보니 자기 세상이 침해받는 것 또한 극도로 싫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겨울이 하늘 높이 쌓은 담장 안에서 활개친다. 싸아한 냉기는 저희들끼리 뭉치고, 빙판으로 덮힌 계곡 얼음장도 여전하다. 벌거벗은 나무는 기척 없고 사나운 바람은 굳이 손톱을 감추지 않는다. 그래도 모처럼 황사바람이 지난 뒤에 이를 위로하듯 비가 내렸다. 겨울 안에서 맨살에 닿는 눅진함이 좋다. 숲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부터인가 통증에 무덤덤하게 되었다. 가슴에 박힌 비수 하나. 끔찍하여 외면한 채 두기로 했는데, 어느 때에는 딱지진 자리가 근지러워 밤 새워 긁기도 했다. 습관 나름이지. 상처가 아물고 터지기를 반복하여 너덜너덜한 자국마저 익숙하게 되었다. 멈칫거리던 피는 쉬지 않고 칼 끝을 돌아 잔뜩 벼린 날이 마침내 가슴을 관통해 버릴 기세였는데, 그나마 칼자루가 버텨 비로소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을 즈음이면 되살아나는 알싸한 통증. 지겨워도 떨치지 못하는 겨울처럼 비수는 교감도 없이 가슴팍에서 까딱거렸다.
똘똘똘, 어디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계곡 건너편 쯤에서 딱따구리가 요란스레 나무를 쪼아 댄다. 입을 다물고 코를 킁킁댄다. 잦아든 바람에 어우러져 일렁이는 숲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선반에 올려 둔 연장을 내리듯 상기하면 익숙한 숲과 나무와 풀의 냄새. 동고비 한 마리가 침입자를 경계하듯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잽싸게 건너뛰었다. 발을 조심스레 딛어야 한다. 흙이 들썩인다. 종종거리는 풀꽃들. 겨우내 언 땅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올라왔을까. 온 우주를 떠받히고서도 힘겨운 기색도 없다니. 눈 쌓인 계곡 아래서 물길이 실금을 긋다가 배배 꼬인 여울목에선 소리 높여 촐랑대기도 한다. 부시시 눈 비비며 떠올랐다가는 가라앉기를 되풀이하며 그렇게 쫓는가. 키 큰 겨울이 자빠진다. 헐거워진 비수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자 지난한 기억이 허물어졌다.
이성계가 산의 기개를 보며 手長三尺可摩天(손이 석 자만 되어도 가히 하늘을 만질만하다)이라, 읊었다는 천마산 계곡에 봄날 피가 흩뿌려져 사방에 낭자하다.
Giovanni Marradi, Anna's the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