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56번지라니,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꼬질꼬질한 동네 고샅길을 아까부터 오르내리는 아낙네. 모피로 상체를 감싼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거의 울상이었는데 사람 기척이 일어 반색한다. 바람에 들썩이듯 열린 함석문을 향해 돌아섰다. 저어기요? 마악 말을 붙이려다가 멈칫한다. 저게 사람인가? 씻지 않은 듯 꾀죄죄한 몰골에 털복숭이 상판뙈기라니. 덜컥 나타난 것만 해도 오금 저린데, 산적 같은 녀석 냉담한 눈길에 한번 더 철렁한다. 마른 목구멍을 긁어 가래침이나 퇘액 뱉다니. 주저앉을 듯 뒷걸음질하며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문질렀다. 온 길을 달음박질쳐 하시라도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오늘 햇빛이 들자 산동네에도 비로소 온기가 돈다. 아침부터 왠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끌벅쩍하다. 덕분에 신난 아이들. 아직 겨울을 떨어내지 못한 여자 애가 골목길을 맴돌며 비눗방울을 띄운다. 오색영롱한 구슬이 동동거리며 떠다닌다. 보는 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철없는 남동생이 비눗방울을 쫓아 이리저리 날뛰었다. 저만큼에서 소리 지르던 아이 엄마가 쫓아와서는 등짝을 후려친다. 아이들은 냉큼 끌려갔다.
그래도 도무지 꺼림칙한 구석이 없었는데, 갑자기 궁금하다. 겨울을 지나며 우리 마음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환절기의 덕유산. 바람이 으르릉대는 산 아래쪽과 달리 위쪽은 오히려 고요하다. 사박거리는 눈은 습기를 잃어 맥이 없다. 그래도 마지막 겨울 자락이라도 붙잡고는 딩굴고 싶은 이들이 악착같이 버틴다. 가파른 경사에 보드로 서자 아찔하다. 기꺼이 흘러내려야지.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서자 오직 나아갈 길만 보인다.
휴일이어도 여느 때 같지 않게 한산한 산길. 구천동 계곡으로 하산하다가 엉덩방아를 서너 번이나 찧었다. 아이젠도 착용하지 않았지만 장비 때문에 잔뜩 웅크린 탓이다. 긴장해도 느낄 수 있는 간지럼. 보이지 않는 숲 안쪽에서 꼬무락거리는 기색들. 주목이나 전나무 등 푸르른 기색 역력한 곳에서 나름대로 용을 쓰는 활엽수들. 신갈과 졸참은 아직 부석부석하다. 물푸레나 사스레, 황벽나무나 대팻집나무, 개옻나무 등은 삐죽삐죽 솟았다.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바닷가에 선 듯 바람이 철썩거렸다. 까마귀들이 제 터전 주변 허공을 맴돌았다. 해빙의 조짐을 타고 시냇물이 소리 높여 쫓아내려간다. 손꼽아보니 예정에 없이 이 산을 몇 번이나 거쳐갔다. 어느 함박눈 내리는 날에 산벚나무 등걸에 얹혀 꼬물거리는 눈발을 사진에 담았다. 지금 마이콘으로 쓰는 이미지인데, 그 저녁에 어른이 운명했다. 핏줄처럼 하늘에 놓인 나뭇가지를 우러렀다. 한번도 당신을 위해 울어 본 적이 없어. 지닌 술을 딴다. 계곡에 뿌리고서는 나도 한 모금 마셨다. 시큼한 맛이 기억을 적신다. 세상을 헤아릴만한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말야. 아무렇게나 혼잣말을 뱉었다. 울지 않는다고 울음을 듣지 못하실 리 없지. 천방지축으로 비눗방울을 쫓으며 보낸 날이던가. 애틋한 봄날과 성한 여름을 지나 이제 가을도, 겨울도 그렇게 넘어 버렸다.
Yanni, With An Orch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