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아 그렇지, 남자도 수다스러울 때가 있다.
여편네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더니, 것두 옛말이제?
그저 눈치 보며 비위 안거슬리고 소리 높이지 않아야 살기 쉽지.
평생 탈없이 산 게 여편네 덕이라는데, 말인즉 어떻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느냐고오.
한둘이 운을 떼더니 질새라 너도나도 끼어들어 침을 튀긴다. 말이 난 김에 속내까지 까발려야지. 눈에 보이면 잔소리를 해댄단다. 혹여 마누라님이 늦은 아침까지 침실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그제서야 거실에서 활개친다나. 허나 그것도 일순간일 뿐이다.
당신은 휴일에 약속도 없쑤?
느지막히 나와 찌부둥한 인상으로 날리는 하이킥 한 방에 비루먹은 강아지마냥 꼬리를 말 수밖에. 전날 술자리에서 뻗대다가 별 수 없이 들이켜서는 몸이 천근만근이어도 뭉기적거릴 수 없다. 건성으로 차리는 아침이라도 얻어 먹으려면. 반면에 아이가 제 방에서 늦잠이라도 자면 발소리를 죽이고 다니라는 시늉에 이건 숫제. 가장 위신이 이래서야 안된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동질감으로 부추긴다만 한바탕 쏟아내어도 그때 뿐이니 어쩌나. 위안이라도 받았으면 싶은데 이 녀석들은 눈치도 없어. 늘어놓은 비굴한 패배감을 종내 떨치지 못해 씁쓸하다. 겁쟁이 토끼들처럼 한탄하며 죽으러 가자고 선동할 수도 없다. 앞으로가 문제야. 힘도 재력도 없이 어떻게 버틸까. 무지막지한 여편네 얼굴을 떠올리기만 하면 치가 떨린다. 그 여편네도 말야, 한때는 새초롬한 봄날 풀꽃 같았는데.
봄이 오면 꽃이 피는가. 꽃 피면 봄이 오는가.
따질 계제가 아니다. 앗차 하는 순간 들이찬 봄이 사방을 띄운다. 몽롱하다. 되는 일 없어도 기대감만 부풀려 괜히 두리번거린다. 휴일 오후, 적요한 산길을 오르다가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눈을 부빈다. 길가 둔덕에 저리 환한 보석들이라니. 처음에는 눈 질끈 감고 지나치려고 했다. 주저앉으면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하지만 차츰 무리지어 노래 부르며 자태를 곧추세운 모습을 보며 곁에 앉지 않을 수 없다. 얼레지란 녀석은 정말이지, 처녀 적 아내처럼 뒤돌아서 고개 숙이고는 좀체 마주하려 들지 않아 애를 먹는다.
Ralf Bach, Loving Ce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