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사람의 마을

*garden 2011. 8. 22. 16:27




귀소본능이야 누구에겐들 없겠냐만 여느 사람 못지 않은 내가 요즈음 가지는 의문 하나, 집이 집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깥에서 식사하는 일이 잦다. 출근해서야 별 수 없다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매식으로 끼니를 이어야 하다니. 식당이란 이질감을 떨칠 수는 없을까. 한 구석에서 시끌벅쩍한 일단의 여자들을 본다. 밤낮 없이 몰려와 거리낌없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왠지 거북살스럽다. 시대 조류가 그런가. 여자들은 바깥으로 나서고 남자들은 바야흐로 집 안으로 기어드는 추세이다. 허긴 늦은 귀가가 대부분이고 첫새벽에 일어나 나가는 생활을 몇십 년이나 했으니, 오죽하면 현관에서 구두를 신는데 뒤에서 입을 삐죽일까?
여기가 잠만 자고 나가는 하숙집이우?
하숙집이든 아니든 간에 이 여편네가 달라졌다. 뭐가 그리 바쁜지 도무지 낯을 마주칠 수 없다. 말끝도 치켜올리는 게 도발적이다. 예전처럼 버럭거리거나 독설을 쏘아붙여야 하나.
귀가해도 맞아주는 식구가 없다. 불꺼진 현관에서 구두끈을 풀며 느끼는 서글픔이 새삼 벽처럼 막막하다. 맹숭맹숭하니 견디다 보면 때를 놓치는데, 그걸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아니, 그 손은 어떤 손이길래 밥도 차려 먹을 줄 모르오?
말 끝에 아이들은 나긋나긋하게 챙기는 게 비위가 오죽 상해야지. 이는 이미 권력이동이 시작되었다는 반증이야. 조만간 힘의 중심에 설 아이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여자들 속성일까. 그래서는, 하여튼 간에 집 근방 식당을 기웃거린다. 마침내 손맛이 좋은 곳을 찾았다. 나보다 연배가 위인 주인장이 오랜 동안 고기를 재워서인지 제법 맛깔나게 차려낸다. 식사중 반주도 무리 없어 망설이지 않고도 발길을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문턱에 발만 걸치면 사람 좋아하는 주인장이 반색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 바둑을 평정하여 싱겁던 차에 두어 보니 맞수인 솜씨에, 오만함인지도 모르지만 식자처럼 의젓한 태를 보이는 내가 싫을 까닭이 없다. 섣불리 우정이라고 할 수 없지만 날마다 새록새록 쌓이는 정이 만족스러워 웃음을 짓는다. 영업을 파할 때까지 마지못해 붙잡혀서는 몇십 년은 묵혀 녹슨 솜씨로 당구도 치고 노래방까지도 가게 되었다. 당연히 집에 찬밥 덩이만 남은 눈치이면 식구들까지 독려하여 식당에 내몰게 되었다. 헌데 유난히 아이만은 거기를 질색한다. 불결하다느니 친절하지 못하다느니 이유를 들먹여 초를 친다. 단순한 세대 차의 문제인가. 이 녀석 눈치를 보니 식당 주인이 벅차다. 드러낼 수야 없지만 능글능글한 태도가 탐탁치 않다. 의외로 늦은 시각에도 붐비는 식당에서 제 아비에게 소홀한 주인이 못마땅하다. 컵이나 물도 손수 꺼내와야 하고, 떨어진 반찬은 언감생심 요구하지도 못한 채 알아서 기어야 하는 억울함. 똑같은 돈을 내고서도 행세 못하는 처지에 대한 원망이 강하다.
오늘은 다른 곳에 가요. 제가 근사한 데를 알아요.
추천하는 곳을 가보면 그야말로 국적불명의 음식 맛이 절망스럽다.
이게 뭔 맛이냐?
그래도 깨끗하잖아요.
주방 안까지 샅샅이 훑어 보았냐?

토를 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억지로 말을 물고 늘어져 피곤해질 필요가 있을까. 아이에게도 생각의 재량이 있으니 부릴 수 있게 두자. 납득시킨들 나와 좋아지리라 기대하기도 힘들다. 스스로 아무리 재어본들 나도 내게 만족할 수 없는데 말야. 때를 기다려야지. 그래서 절실해진 다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깨닫도록 하자. 아이들과 근사한 곳만 찾아 다닌 적도 있다. 이제 그러기엔 지쳤다. 헤맨 다음에야 느끼고 짐작할 수 있을게다. 부담없이 앉을 수 있는 자리, 누워도 거리낌없는 곳이 어디인가를.











Giovanni Marradi, Ag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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