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예회날이다. 열일 제치고 달려온 동네 어른들. 서로 안부나 근황을 묻느라 여념없다. 그러다가 선생님에게는 깍듯하게 허리를 굽힌다. 드디어 마련한 연극무대가 열렸다. 연습 때에는 단락마다 끊어져 볼품 없었는데 막상 시작하자 그럴 듯하다. 아이들도 긴장하여 자기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 더러 실수를 연발해도 어른들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아량도 있다. 거기서 시큰둥한 배역에다가 대사도 몇 마디 없이 끝난 내 역할에 부아가 치민 어머니, 집에 와서도 역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기 뭐꼬? 하는지 마는지. 우째 남자가 숫기마저 그리 없노?
늘상 하는 압박이다. 나야말로 억울하다. 그 몇 마디를 하려고 몇 날 며칠을 남아 연습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을 뿐인데. 물론 연습때 잘하면 몇 마디 더 할 수도 있을게다. 혹은, 너야말로 이걸 연기하는 게 더 낫겠어 하여 다른 배역으로 바꿔치기 했을 수도 있다. 허나 한계이다. 성격이나 습성 자체가 그리 움직이게끔 되어 있지 않다. 나야말로 딱 그만큼인 게 좋은데, 어머니는 못마땅하다. 내가 뻔뻔스러워져 천방지축 날뛰기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까지 보이니, 그게 쉬운 일인가. 익혀 온 염치가 숫기를 꽉 눌러 억제시키는데.
으레 설치는 아이들이 있다. 하나둘 시선이 모이면 유치한 얘기까지 동원되어 낄낄거리며 동화한다. 낯 간지럽게 그게 뭐야. 외면하여 바깥으로 나도는 내가 나도 버겁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서 심드렁하니 찬물이나 끼얹는 꼴이라니.
지방까지 원정해 산에 올랐다. 고된 산행 후 허기진 배를 채우는 기쁨만한 게 있을까. 인솔자가 거기서 유명하다는 식당에 인도한다. 그것까지야 나무랄 것 없는 일정인데, 나중 설명이 가관이다. 그 식당 할머니가 하도 욕을 잘해 그곳 명물 반열에 든다고. 할머니를 억지로 불러냈다. 이른바 걸죽한 욕 한 마디 해주십사 하고. 멍석을 깔아 놓는다고 되는 일인가. 한참 동안 눈만 멀뚱멀뚱한 할머니와 그 입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가관이다. 호기심어린 아이들까지 동반해서는 말야. 아무리 퍼포먼스가 필요한 시대라지만 욕까지 이렇게 들어야만 할까. 머쓱함도 참을 수 없지만 욕이라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 성큼 앞으로 나섰다.
억지로 욕을 하실 필요야 있겠습니까? 그만 들어가시지요.
기대를 뭉그러뜨렸는지 실망스러운 한탄이 쫓아나온다. 순간 가만히 있던 할머니가 나를 보며 쌍욕을 덜컥 쏟아냈다. 사람들이 웃었다. 낯이 화끈하다. 내가 만신창이가 될수록 다들 더 웃었고 할머니는 욕을 줄줄 낸다. 과연, 욕을 저렇게 하면 속이야 후련해지겠지. 주름진 입과 고르지 못한 이가 아주 보기 싫다. 심지어는 만류하는 나 때문에 찔끔했던 이들까지 큰소리로 웃으며 부추긴다.
더 심한 욕을 해줘요?
같이 웃을 수 없다. 이만 그쳐야지. 소리친 이를 노려본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나를 알아차리고는 일행이 말린다.
이 사람이 취했나?
취하긴 뭐가 취해. 여기까지 와선 그렇게 욕 먹고 싶나? 내가 해주지.
헌데 참 이상하다. 길길이 날뛸수록 사람들은 웃어 넘긴다. 함부로 웃지도 못하고 눈치 보던 식구들까지 애매하게 눈길을 피한다. 가끔은 그런 게 절망스럽다.
털털하지 못하여 경직된다는 건 주변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다. 내게 숫기가 없음을 절제나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옆에서는 이를 고집이라고 한다. 딴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가파르게 넘던 깔딱고개를 떠올렸다. 어떤 이는 욕을 달고 내내 궁시렁거리며 넘었다. 나야말로 숨소리도 참으며 넘었는데. 때로는 눈 질끈 감고 넘기지 못하는 내가 안타깝다. 결국 숫기 없이 살아버린 나를 만나면 어머니는 제일 먼저 뭐라고 꾸중 하실까?
Vitalij Kuprij, Crying In The Shado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