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이 왔다. 처리된 일과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을 떠올린다. 별 다른 일이야 없을테고. 의아하지만 고개를 흔든다. 비서실을 통해 들어갔다가 난데없이 혼쭐이 난다. 날벼락이란 게 따로 없다. 이럴거라 짐작이라도 했어야지. 명색이 중역이라 맞대응할 수도 없고. 묵묵히 있는 동안 상대는 말을 뱉을수록 화가 치미는지 분을 삭이지 못한다. 입고 있는 옷이라도 찢어발길 태세이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중역실이 쩌렁쩌렁 울린다. 오죽하면 영문 모르는 다른 부서 직원들이 복도에 쫓아나왔을까. 어안이 벙벙하여 다들 눈치만 본다. 광풍이 몰아친 다음은 씁쓰레하다. 일의 자초지종을 안 이들이 어이없다.
"거참, 전혀 화를 낼 일이 아닌데 그러네요."
"그나저나 참 대단하십니다. 저 같음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넘어갔을텐데."
나도 화를 참지 못하는 적이 있다. 아니 점점 화낼 일이 잦다. 가슴에 내내 불기둥을 안고 있는 형국이니 어떻게 해야 하나. 눈을 뜨면 마주치는 경우 없음이나 몰지각함, 불투명함이나 부조리, 예의 없음, 알지 못함과 알 수 없음, 허위나 딴청에 대한 살의를 덮어 둘 수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난도질하여 피를 흠뻑 묻힌 두 손으로 부여잡은 술잔을 벌벌거리며 입에 털어 넣은 적이 부지기수이다.
물과 불처럼 앙숙인 사무실 동료들이 있다. 달래거나 꾸중을 해도 아랑곳없이 해를 넘길 동안 한치의 양보도 없이 등 돌리고 있으니. 별 일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색하여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면 둘이 똑같아 우습기도 하다.
식구 중에도 내게 미운 털이 박힌 녀석이 있다. 그 녀석만 떠올리면 낯부터 찌푸려진다. 왜 하는 짓마다 미울까. 미운 짓을 참지 못한 상대 질책에도 구애받지 않고 능글능글한 꼴이라니. 곧잘 이기적이기만한 태도도 보기 싫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게, 뻔한 파국을 가늠하여 간신히 눌러 참을 뿐이다. 오죽하면 옆에서 보는 이가 타이를까. 그런 내가 안쓰러운 모양이다.
"쟤만 보면 눈에 쌍심지를 켜네요."
"응, 한번 미워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어. 내겐 분노하며 미워하는 감정도 힘이야."
던진 말을 곱씹어보다가는 금방 후회한다. 좋고 싫은 감정을 바로 표출하지 않도록 훈련 받았다. 절제된 속에서 일의 선후가 분명하도록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나. 감정의 폐허 속에서 증오심만을 채워 인제 사랑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무조건 다가서고 그게 여의치 않을 땐 막연하게 미워하는 버릇이 생겼다. 가파르게 내린 묵정밭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한쌍의 소나무를 물끄러미 본다. 밭 주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나무가 대견스럽다. 저런 여유를 왜 잃었는가. 고슴도치 사랑이라도 다시금 새겨야 할 때가 아닌지.
Capozio, Sere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