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단고개

*garden 2011. 11. 29. 15:36





비탈밭에 웅크린 녹산아지매. 바지런한 손길 따라 어느덧 머리 위에서 자글거리는 해. 한나절이 넘었다. 겨우 두 고랑 해치우고서는 한숨이다. 오늘 따라 진척이 없네. 일어서자 다리가 후들거린다. 어지러운 걸음을 뗀다. 밭은 아지매에게는 귀한 세상이고, 밭을 나오자 또 다른 세상이다. 두건을 풀고는 그늘에 둔 바구니를 뒤적인다. 선머슴아처럼 냉수를 쿨럭쿨럭 마셨다. 그러다가 나를 보며 손사래를 쳤다.
야야, 니는 낭중에 절대로 흙에 코 쳐박고 살아서는 안된다이.
아지매 넋두리 아니라도 바람이 불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운다. 댓가지 윗부분이 술렁거린다. 대추나무 맨가지들이 바르르 떨렸다.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없다.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일어섰다. 어느 날의 바람은 향기를 묻혀 오기도 하고, 척척한 습기를 실어나르는가 하면, 상큼한 햇살을 한움큼씩 뿌리기도 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쏘다니기도 하고. 만만한 세상을 향해 소리도 질러본다. 어디 반향이라도 없을까. 가끔은, 고개 앞에서 움츠러드는 어깨. 앞서 간 일행이 진땀 뺐다며 혀를 내두른다. 쉬엄쉬엄 넘어서는 안되지. 목표지점까지 선을 그어 내달리던 습성으로 지친 몸을 주저앉히면 불안해 곧잘 일으키곤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행과 부대끼며 하늘까지 닿은 시루고개에 올랐다. 언제나 앞서가 기다리는 바람. 비로소 배낭을 벗고 몸의 열을 식혔다. 산이 결로 첩첩이 밀려나간다. 그게 밭고랑 같다. 밭고랑 한가운데서 꼼짝 않는 녹산아지매를 떠올렸다. 아랫마을 아재가 들쳐업고 냅다 뛰었지.
제 아무리 뻣뻣한 고개라도 고개 앞에선 숙여야지.
뒤이어 다다른 이들이 툴툴댄다. 이제 끝이냐고들 묻는다. 꼬부랑 할머니가 넘던 꼬부랑 고개도 열두 고개랬는데, 앞으로도 줄줄이 엮인 고개를 꾸역꾸역 넘어야지. 녹산아지매처럼 고개를 채 넘기도 전에 쓰러지지는 않을거야. 또 다음 고갯마루를 넘으면 거기 우리가 찾는 무어라도 있지 않을까. 넌지시 수긍하듯 끄덕인다. 웃음과 눈물이 고비마다 범벅인 인생고개도 마찬가지잖아. 어떤 이는 신념 보따리를 이고서는 힘차게 올랐다. 또 다른 이는 사랑만을 잔뜩 품고서 오른다. 누군가는 허무를 안고서도 잘들 넘어간다. 야망이나 오기를 품고서 입을 옹다물고 내딛는 이도 있다. 걸음 끝에 앞서간 이와 어느 때 다시 만나기도 하며, 허겁지겁 폭풍걸음을 내딛더라도 이내 뒤따라온 이에게 추월당하기도 하는 고갯마루에 오늘은 비 내린다. 꽃이 피었다가 흔적 없이 졌다. 드디어 한 고개를 넘었다. 겨울이 형체만 드러내며 저만큼 버틴 길목이다.












Francis Goya, Torn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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