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다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도 그때가 좋아!
때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하루도 걸르지 않고 이어지는 술자리. 벌써 몇 잔째, 폭탄주를 앞에 두고서도 거리낌 없다. 나는 다만 심각하다. 술자리라면, 으레껏 요령 있게 마시지 못한다고 듣는 핀잔. 사실 핑게를 대거나 내숭을 떤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앞에 둔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어서 두말없이 마신다.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술을 마신다면야 질색이지만 그런 편도 아니고.
좋은 자리에서는 술도 달콤한 법.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보다 좋은 일이 있다면 말해 보라. 오래된 사람은 오래된 사람대로 익숙해서 좋고,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대로 친근해서 좋다. 맑은 차(茶)가 좋을 수도 있지만 어딘가 박정한 듯해서 말야. 때로 남자들은 허물없이 속도 털어놓고, 게슴츠레 웃으면서 상대에게 비쳐지는 자기를 빤히 들여다 보고 싶어한다.
꽃다운 시절의 흔적이라도 떠올릴 수 있다면
때가 되어 누군가를 떠올리고 연락하는 일은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나마 이어질 수 있으니. 생각 같아서는 엇갈려서라도 찾아 든 이들을 모아 한자리에서 왁자지껄했으면 좋겠다만 그게 못마땅한 이도 있다. 낯가림이 심한 이는 악착같이 피하기도 하고. 허긴 그런 억지자리 때문에 욕먹은 일도 더러 있다. 세상 모든 이가 한 방향으로 서 있다고 다 같을 수는 없는 일.
어울림은 조화다. 때로는 식사와 함께 곁들인 반주로 권커니 잣거니 마시는 중에 받는 귀가재촉 전화도 무시할 수 없다.
대체 며칠째인지 아세요?
말 끝에 세운 날이 벼리다. 자리가 금방 끝난다며 얼버무리지만 어디 쉬워야지. 일어서려다가는 이어지고, 일어서는 상대를 앉혀서는 다시 이어가고, 그러다가 거듭 전화를 받아서는 곤란한 지경이 된다. 어느덧 사람 대 사람이 아닌 술 대 술이 이끌어가는 자리여서 말야. 입버릇처럼 '가야지.'를 되뇌지만 의지대로 될 수 없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밤도 대수롭지 않아. 질펀한 술자리가 밤바다를 떠가는 배처럼 흔들리며 이어진다.
지난 시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는, 하지만 만질 수 없는 골동품인가
일과가 끝나면 당연히 귀가해야 하는 일이 왜 난처한가. 뚜벅이로 걸어 당당하게 들어가야 할 터인데. 멋적어 가면이라도 쓰고 싶으니. 밖에서 뛰던 얼굴과 집 안에서 식구들을 대하는 얼굴은 달라야 한다.
한때는 재기도 엿보여 어른들 칭찬을 심심치 않게 들은 적 있다만 세월에 닳고 닳은 나. 인제는 천덕꾸러기로 남은 것 같아 처량하다. 깡마른 육신을 훑고 지나는 바람 아니어도 꼿꼿이 서 있기조차 어렵다. 꼴난 자존심으로 삐죽이는 버릇도 없애야지. 티도 내지 않고 죽은 척 사는 방법을 알아보자. 침묵으로 자신만만해 하기 보다 억지로라도 수다스러워야지. 그렇게 차츰 죽어가야 하나.
Secret Garden, Passacag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