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큼 보이는 전동차. 안내방송이 웅얼댄다. '털퍽털퍽' 계단을 뛰어내렸다. 문이 닫히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올라탔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발뒤꿈치가 닿았지만 그 정도 쯤이야. 매무새를 추스르며 겨우 숨을 고른다. 그때서야 시큰거리는 발목. 계단을 두세 칸씩 건너뛰며 엇딛거나 다리가 엉키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위험한 일이었다. 늘 그렇다. 여유 있게 다니지 못하고는, 멈칫하거나 두리번거리지 못하는 습관 탓이다. 길에서도 한발한발 떼는 중 차츰 빨라지는 걸음걸이로 누군가 어정거리면 기어이 따돌리고 앞질러야 하니. 횡단보도 신호등이 멀리 깜박이기라도 하면 뛰는 일은 다반사. 고민하기에 앞서 판단하고 내쳐뛰는 걸 멈추지 못한다. 소일하고 보내고 기다리는 걸 왜 손해라고 여기는지, 무엇이 이렇도록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전동차 안과 밖은 또다른 세상이다. 영하로 뚝 떨어진 기온으로 냉랭한 바깥에 비해 안은 난방을 올려 덧옷이 거추장스러울 정도이다. 거기에 북적이는 인파와 헐떡이며 쫓아든 여파로 범벅이 되어서는 견디기 어렵다. 겨우 사람들을 헤치고 서 있을 만한 자리를 잡았다. 신문이라도 펴들까 하다가는 포기한다. 대신 종일 쫓고 쫓기던 생각이나마 자유롭도록 놓아 두어야지. 나란히 앉은 이를 내려다 본다. 퇴근길이라 졸거나 눈을 감고 있는 이가 대부분이다. 작은 덩치에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앞 사람이 팔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일곱시 오분!', 그리고는 점퍼 안에서 목줄로 걸어 둔 폴더 손전화를 꺼내 확인한 다음 소리쳤다. '딱 맞네, 딱 맞어.'. 예순이야 훌쩍 넘겼을테고 얼결에 소리낸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잇는 중에 다시 시계를 보는 노인네. '일곱시 칠분!'. 역시 가슴께 손전화를 꺼내서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소리를 친다. '딱 맞네, 딱 맞어.'. 전동차가 정차역에 선 다음 사람들이 내리고 탔다. '일곱시 십일분!'을 확인한 노인네가 다시 소리를 쳤다. '딱 맞네, 딱 맞어.'. 이번에는 시선을 드는 바람에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바람에 새로 탄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나와 노인네를 번갈아 쳐다본다. 상황이 난감해졌다. '그것 봐라.' 하는 투로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는 상대에게 일순 거부감이 일었다가는, 의외로 해맑은 눈을 보고는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슬며시 눈길을 돌린다. 다음 번엔 시계 분침이 맞지 않은지 조정을 한다. 그 새 일이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노인네가 소리를 쳤다. '딱 맞네, 딱 맞어!'. 관심을 보이던 이들이 이내 무표정해져 눈을 돌린다.
일과에 파묻혀 있다 보면 끼니를 거를 때도 있다. 출출함을 참지 못해 들르는 사무실 옆 분식집. 때가 지나 나른한 시각이다. 게슴츠레 졸던 아주머니가 눈을 뜨자 쌍꺼풀이 확연해진다. '라면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주섬주섬 일어나 두말없이 양은냄비에 물을 따뤄 올리는 손. 한주 전 새까맣게 물들인 머리가 제법 뽀글뽀글했는데, 그새 못참아선 다시 퍼머 덮개로 머리를 덧씌우고 있다. 힐끗 보니 새빨간 입술에 털실로 짠 진한 빨강 덧저고리가 낯설지 않다.
지난 가을부터 끊임없이 꽃대를 올리는 난. 시름까지 끌어올리는지, 마디마다 꿀까지 맺혀 있는 게 애잔하다. 관심이 그렇게 그리운가. 그에 비하면 나는 어떤가. 한번 채워진 적도 없었건만 비워지지도 않아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 않았나. 쉬면 큰일나는 줄 알고 내달려 바닥나 버린 그릇 안이 시끄럽다.
Rondo Venez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