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TV를 바꾸겠다는 아내. 휴일 한낮, 거실 바닥을 종종거리는 햇빛에 시선을 두던 중이었다. 마침 머릿속에 엉킨 실타래까지 풀어 놓았던 참이라 제꺼덕 반응할 수 없다. 대꾸 없이 쳐다보자 그제서는 딴전이다.
화면에 흐릿한 결이 가끔 생기지만 멀쩡한데 왜 바꾸려고 할까. 예전처럼 옥상에 올라가 안테나를 조정할 필요도 없이, 불면을 벗삼아 오밤중에도 거뜬하게 방영되는 영화에 심취해서는 한잔 술을 곁들이며 느긋하게 빠져있기 일쑤이건만 억하심정으로 내지르는가. 오래되어 싫증난 건지, 아니면 으리으리한 가전매장에 들렀다가 상냥한 직원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건가. 연유야 알 수 없지만 TV만 바꾸어야 한다고 작정하는 걸까. TV를 시발로 이것저것 바꾸겠다고 나서면 그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차라리 이사를 한 다음 집에 맞는 가전제품을 들이겠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지만 그것도 아니고, 슬쩍 운을 떼서는 반응을 살피려는 건지. 사실 나야 TV 앞에 머물러 있는 적이 드문 편이니 이를 바꾸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쓸데없는 걱정으로 애면글면하는 꼴이 우습기도 하다. 예전처럼 저녁을 먹고서는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드라마를 시청하던 일을 이제는 떠올리기조차 까마득하다. 덧붙이자면 우표나 수표, 종이신문, 도서, 유선전화 등과 함께 십년 내 사라질 품목으로 TV가 거론되는 판국에 몇백만 원이나 들여 TV를 개비한다니 말이 되는가.
일 저지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편인데, 어느덧 일이 파급되어 번잡해지는 것이 싫다. 당연히 피하려고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는 것들의 소용들이에서 헤어나지 못해 어리둥절한 나. 시간이 지나 변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때로는 간직하고픈 것도 있지 않은가. 익숙해질 만하면 바꾸려는 시스템이 작동하니 따라가기에도 힘겹다. 이동전화가 2G에서 순식간에 3G를 지나 4G로 옮겨간 것이나 강제 번호이동 등과 사용하지도 않는 옵션에 나를 억지로 껴맞춰야 하는 일도 혼란스럽다. TV는 지금도 OLED, 스마트, 3D로 나뉘는데 조만간 구동 형태부터 화면, 본체 등이 대폭 바뀔 것이다. 연말에 전격적으로 방송이 디지털로 전환되는 과정 또한 산 넘어 산이다. 때로는 블로그질로 뗄래야 뗄 수 없는 포털 다음의 변화도 짜증스럽다. 변화를 줄라치면 우선 오류가 난다. 오류야말로 꼭 내가 어떤 중요한 일을 다음에서 행할 때여서 그게 더 화를 돋운다. 수익 창출 때문인지 마우스를 갖다대기만 해도 팝업창이 열리는 광고를 로그인 난 바로 아래 위치하게 했는데, 이도 성가시기 짝이 없다. 용의주도한 나도 이런 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그렇다고 대뜸 이용 포털사이트를 바꿀 수도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견뎌야 하는 인내의 폭은 대체 얼마나 넓어야 하는가. 훌쩍 떨치고 일어서면 속시원하겠지만 이래저래 결행 못하고 속 끓이는 우리. 외롭다고 진저리를 치면서 사람을 피하고 싶어하는 판국이다. 평생 책을 펴내는 일을 해오면서 같은 톤이나 같은 계열로 귀착되는 것을 극력 피해왔다. 하지만 업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고집 하나가 어느새 한몸뚱이로 자라 길게 늘어져 있지 않은가. 변화에 진저리를 치다가 문득 동면에라도 든다면 과연 그 다음의 바뀐 세상이나마 받아들일 수나 있을까.
George Winston, Variations on the Kanon by John Pachelb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