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긴 겨울 밤. 어둠에 어둠이 더해져 막막한 세상을 얼음나라를 지나온 바람이 무법자처럼 설친다. 밤에 속한 것이 일절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진작 사방 문을 걸어 잠궜지만 은연중 별별 염려가 더해진다. '아직 아부지도 안오셨잖아.' 선잠에서 깬 우리는 눈을 말똥거리다가 이불 안에서 키득거리기도 하고 장난을 일삼아 그새 꾸중도 듣는다. 밖은 바람이 사납게 들쑤시고 다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이마까지 끌어올린 두툼한 무명이불을 슬며시 내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길도 없는 칠흑같은 밤을 가로질러오는 구둣소리. 아버지가 골목 어귀에 들어서는 기척이다. 아랫목에서 빨랫감을 일일이 펴서 개고, 낡고 헤진 식구들 누더기 옷도 기우던 어머니는 실밥을 입에 물고는 앉은 채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그러다가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며 벽시계를 보고 혀를 찼다. '아고, 지금 몇 신데, 대체 이 시각까지 뭘하고 돌아댕기셨대.' 통금 사이렌이 울린 지 한참이다. 오밤중이어도 저녁 밥상을 봐야지. 늘어진 몸을 추스린 어머니가 부엌으로 내려간다. 헛기침과 함께 들어선 아버지 손에 들린 군것질거리에 나와 동생들은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서둘러 내려오시지요.'
넌지시 말을 던지고 전화기 너머에서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무는 동생이 보인다. 예전처럼 단번에 매조지되는 일이 없다. 주변과 보조를 맞추느라 늦추는 일이 있는가 하면 미처 여건이 되지 않아 미뤄둔 일도 있고, 내내 검토중인 일도 있다. 그런 걸 연휴에나 차근차근 살펴볼까 싶었는데. 어젯밤 뉴스에 비치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려가던 귀성차량 행렬이 생각났다. 불안한 미래에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다는 소리만 버릇처럼 내뱉었다. 팍팍한 살이라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자포자기하며 주저앉을 게 아니라, 기지개라도 켜며 일어서면 힘이 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힘든 지경에도 때가 되면 나서 자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 이도 우리네 오롯한 정서라, 이해하지 못하면 비감스레 비칠 뿐이다.
'그래, 만사 제쳐두고서라도 가봐야지.'
어른이 계시지 않아 어느새 소원해진 걸음. 때로는 귀를 막거나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간에 일이 있으면 일깨우는 동생. 떨치지야 않지만 굳이 집안일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나와 달라 가상키도 하다. 이리 빼고 저리 재어 주저한 적이 많았다만 망설임을 접자 성정이 급해진다. 환해진 동생 목소리가 살갑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겨울 한가운데 놓인 설이라는 방점. 그 점을 보고 내딛는 걸음 끝에 함께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불 속을 마다않고 새로운 것들을 찾아 그렇게 쫓아다녔어도 만족은 커녕 날이 갈수록 성에 차지 않아 씨근덕대던 일. 와중에도 부산스런 걸음을 잡아 끌던 마음 한 곳을 밝히던 불빛이 이것이었구나. 지금은 사방이 꽁꽁 얼어붙어 걸음이 위태위태하더라도 기꺼이 가 닿아야지. 어둠을 헤치고 어른이 성큼 들어서 안도하던 어릴 적 그때처럼.
Frederic Delarue, Symphony of 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