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난 채 들어온 아이. 혼잣말로 '죽여 버리겠어.'라고 중얼거리기도 한다며 걱정이다. 식탁에도 나오지 않아 소리쳐 불렀다. 마지못해 자리에 앉은 아이가 고개를 숙여 밥만 떠먹는다. 사정을 캐물으려다가는 포기했다. 일상이 뜻대로일 수야 없지. 삭이는 건 본인 몫이니. 울화를 떨치지 못해 다음 날 현관에서 신발 끈을 매면서도 굳어 있더라는 얘기를 안쓰럽게 들었다.
나도 누군가를 향한 살기를 키운 적이 있다. 숫돌에 칼을 갈고 날마다 쫓아가 난도질하는 상상을 하며 전율했다. 부당함에 대한 반발을 역설로 풀 수야 없지만 종내 살의를 감당할 수 없어 내가 나를 죽이기 시작했다. 나약하게 살아남은 건 참을 수 없어. 가슴에 칼날이라도 꽂아 선연한 피를 내뿜고 싶다. 편협하고 소심하여 무력해지는, 고집 센 스스로를 인정하기 어렵다. 세면대에서 낯을 씻다가도, 아니면 칫솔질하는 와중에도 거울 저편 낯선 사내가 보기 싫다.
매일 신문 지면을 차지하는 사건, 사고 들. 남의 일처럼 건성으로 지나칠 수 없다. 기사와 드러나지 않은 정황을 조심스레 추정하는데 진동하는 주머니 안 손전화. 간혹 사무실 직원들 통사정도 있으므로 무심코 받았다. 헌데 인척이 전하는 부고이지 않은가. 집안 왕대부인이므로 일단 말을 돌린다. 근황과 앞으로의 일들을 얼추 연결하여 말을 잇는다. 부고에 대한 반응도 빠뜨릴 수 없다. 살만큼 살았다지만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 동의를 구하는 대신 북적거리는 전동차 안을 둘러본다. 주변 사람 눈치도 봐야 해서 서둘러 끊었다만. 가만, 어디까지 읽었더라? 신문 활자를 더듬어도 조금 전까지 눈길을 두고 있던 곳을 가늠할 수 없다. 한미FTA에 대한 여야의 상반된 입장. 정치권의 격론. 마찬가지로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사람들 이목을 끌고 싶은 포퓰리즘과 이합집산, 이해 관계 등. 결국은 뻔한 얘기들의 나열이라 새삼스럽지 않다. 어제와 같은 오늘, 내일 또한 오늘과 같을 테지만 내색없이 꿋꿋하게 견디는 내성을 가진 우리야말로 용하기 짝이 없다. 대출금 상환일이 눈앞에 다가오지 않았는가. 아침에 넥타이를 매며 앞가림에 대한 궁리를 하는 참에 옆에서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아 언성을 높인 것도 마음에 걸린다.
며칠 새 부쩍 기세 꺾인 겨울. 아침마다 시장 옆 보도블럭을 종종거리던 비둘기 떼가 날아올랐다.
들를 때면 빈손일 수 없어 장만한 선물 꾸러미를 물르라던 어른. '내게 올라믄 소주 한 병만 사 와.' 하고는 호기롭게 소줏잔을 부딪치던 기억이 난다. 장성한 자식들이 완강하여 거들먹거리는 게 보기 싫은지, 종일 채마밭에 주저앉아 흙에 코를 쳐박고 지내기 일쑤였는데. 주름 가득한 얼굴과 오물거리던 입 모양새. 곧아 꼭 쥐어지지 않던 조그만 손을 떠올린다. 얼핏 덮어 두고 있었던가. 이도 회피하기 좋아하는 내 나쁜 습관의 일부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이 이질적이라 여긴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가시다니. 일과 핑게로 선뜻 일어서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Nikos Ignatiadis, Odys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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