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죽는 것도 사는 일이다

*garden 2012. 3. 15. 10:51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면 으레 분쟁 쯤은 각오해야 하나. 중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다음으로 땅이 넓다. 그러고도 영토에 관한 한 막무가내이다. 마치 잔돈 관리에도 지독한 부자처럼. 땅이 넓은 만큼 내부에서도 소요가 끊이지 않는다. 허나 세계의 외침에 귀를 막고 통치를 위한 강경책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에 항의하여 지금도 위구르 티베트 승려들은 분연히 분신자살을 시도한다.
사람은 죽는다. 꽃이 피었다 지고 달이 차다 기울듯 이것은 명확한 진실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자세도 각양각색이다. 한사코 죽음을 거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왜 자기가 죽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절규하며 분노를 나타내는 이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죽음을 향해 의연하게 걸어간 이도 있어 보는 이가 숙연해지기도 한다. 전투를 앞둔 이순신이 수하장수들을 불러 필사측생 생즉필사(必死卽生 必生卽死)를 당부한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무릇 죽음은 안타깝고 애닯다. 당연히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이를 추앙하며, 언젠가는 자기도 앞서 간 이를 따르리라는 것을 안다. 죽음이 곧 삶의 연장이라면 억지인가. 하지만 죽음이 삶의 끝에 놓인 또 하나의 과제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음을 맞을 것이며, 누군가는 죽을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기도 한다. 찰나간에 죽음을 비켜간 이가 있다면 나중 이를 무용담으로 떠벌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는 노릇. 다시금 죽음을 기다리며 여생을 축복처럼 받아들여 지낼 일이다. 주변에 병고가 심하여 투신한 이가 있다. 애도하는 중에 갸웃거린다.
'그만한 일로?'
허나 누군가에게는 별 일 아닌 듯 여겨지는 게 당사자에게는 비켜갈 수 없는 장벽으로 가로막혀 좌절했다면 이도 수긍해야 한다.
나의 남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도 아우르지 않을 수 없다. 부지불식간에 죽음과 맞닥뜨린다면 나는 얼마나 허둥댈건가. 일상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 가급적 죽음 앞에 초연해지려는 노력도 한다. 부디 고귀하고 평온하리라고는 바라지 않는다. 단지 유난하고 난리법석일 수야 없지 않은가. 죽은 다음의 '나'라는 존재는 정말 없어지는 건가 하고서, 답이 없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아둥바둥 행하며 움켜쥐려고 노력하는 지금의 것들이 정녕 소용있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뼈만 남은 겨울, 혹독했던 지난 시간의 기억은 희미하다. 낮게 형성되는 기온과 앙상한 나뭇가지가 어울려 어지러운 걸음으로라도 떠돌기에 좋은 때이다. 스러지는 햇빛에 나를 비춰보았다. 그림자로 새긴 존재의 형체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알 수 없는 길을 헤매었다. 피폐함으로 정신을 건사치 못한 육신만 드리운 건 아닌지.
유학은 정신세계이다. 그 일환으로 조상숭배의 제례를 중시한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는데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든다고 했다. 혼을 위해서는 사당을 짓고, 백을 위해서는 무덤을 만들었다. 여기는 절제와 비움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며, 저절로 공간에서 배려와 경건함을 더할 나위 없이 느낄 수 있는 종묘. 온종일 끌고 온 생의 한 날을 부려 놓고는 하릴없이 주저앉아 있다.



















Chris Phillips, Eternal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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