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차단막이 내린 듯하다. 창 밖에 난무하는 가을햇살. 바람에 햇살이 몰리다가 성글게 되기도 했다. 누워 있는 참에 불쑥 들어온 후배. 일어나 자세를 잡기도 전에 말을 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아무런 생각도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진행중인 일의 앞뒤와 일정 등이 뒤엉켜 머릿속을 달구는 중이었다. 뜬금없는 질문이 넌센스인가, 아니면 정색 하고 답해야 하나. 예의바르며 사람이 좋아 늘 웃지만 더러 주변 식구를 꾸짖을 땐 호된 표정이어서 새삼 쳐다보게 되는 얼굴.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누구하고라도 구애받지 않고 화제를 끄집어내고 대화를 이끌어가며 상황을 호전시키는 재주가 있어 호감이 간다.
"글쎄, 중화민국의 건립일인 쌍십절(雙十節)은 안다만."
"임산부의 날이라네요. 풍요의 달인 시월과 임신기간이 십개월인 점에 착안하여 시월 십일로 정했답니다."
"아, 그런가? 허긴 출산율이 OECD국가 최하위인 1.24밖에 안된다던데. 거기에 고령화까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니."
"저도 임산부의 날이라니까 시월 십일이 빵빵하다고 해서 장난스럽게 정한 줄 알았다니까요."
꼭 무슨 날이라고 해서 정해 기리는 거야 바람직스럽지 않다. 허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성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기념일이 많아 일일이 기억하고 챙기기도 쉽지 않지만 휴일이 많아 좋던 시월. 시월상달은 햇곡식을 신에게 드리기에 가장 좋은 달이어서 5대조 이상의 먼 조상 묘소를 찾아 제사를 드리는 시제(時祭)도 걸려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수는 테트라크티스(Tetractys) 10으로 이는 점인 1, 선인 2, 면인 3, 공간인 4가 합해져 만들어지는 완전수(1+2+3+4=10)이며, 우주를 나타낸다고 한다. 10은 양 손 열 손가락을 기초로 나온 숫자이다. 10은 십진법의 전환점이 되는 숫자이다. 10은 여행의 완성을 나타내며 기원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고대 트로이가 구년간 포위를 견디다가 십년째에 함락된 것도,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구년간 방랑을 하고 십년째에 고국으로 돌아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로마 숫자에서 10은 'X'(완전한 숫자)로 표기된다. 독일의 테오도어 몸젠 이론에 따르면 5를 의미하는 V는 다섯 손가락을 편 상형문자에서 유래했으며, 두 개의 V가 합해져 10을 의미하는 X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10은 한자로 종횡의 길이가 모두 같은 '십(十)'으로 표기된다. 이것은 음과 양이라는 두 방향을 향한 자신을 상징한다. 또한 동서(ㅡ)와 남북(|)이 갖추어진 완전한 모양이라 한다. 기독교에서 10은 '모세의 십계'로 대표되는 숫자이다. 언약의 축복에 대한 감사 표시로 약속한 십일조에서도 볼 수 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걸을수록 세상이 트여 마침내 자유인으로 나를 세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길은 더욱 좁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들듯 문을 지나면 다른 문이 나타나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조심스런 걸음마저 막던 수많은 난관. 어려운 때마다 사용하라던 구슬을 곶감 빼먹듯 내던졌다. 처음에는 아깝고 주저하여 구슬을 사용하기를 망설이기 일쑤였는데 마지막 남은 열 번째의 구슬을 던지고나자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비로소 스스로의 힘만으로 온전하게 서야 할 때이다. 아기 걸음마하듯 새삼스럽게 걸어야지, 하낫둘 하낫둘.
Giovanni Marradi, Aga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