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화사한 여로

*garden 2013. 4. 16. 16:14




꽃이 피었다고 한다. 난데없이 눈이 내려 꽃을 덮었다고 했다. 이를 비가 씻었다. 바람이 요동친다. 사월의 뿌연 하늘과 제대로이지 않은 기온으로 어수선하다. 발목에 통증이 도져 입을 앙다물기도 했다. 걸을 때는 걸음 수를 세며 발을 뗐다. 어제는 여름이었고, 오늘은 겨울이다. 땀으로 젖은 속웃을 미처 갈아입기도 전에 야전상의를 껴입어야 했다. 대체 봄은 어디서 길을 헤매고 있는가.
여행이야 기차를 타야 제맛이지만 우리는 굳이 자동차를 이용한다.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 중 한갓 화장지를 만들어내는 나라는 그야말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그 판국에 어느 때 이 조그만 나라에서 자동차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자동차에 익숙해진 까닭이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도처에 넘치는 차로 몸살을 한다. 우리 아이는 돈도 벌기 전에 자동차를 가질 욕심부터 냈다. 내가 근사한 자동차를 몰고 내려갔을 때, 어머니는 손때가 묻을까 봐 자동차 문을 손수 여닫으시지 못했다.
일행과 함께 움직이니 픽업이라든지 경로라든지 신경 써야 할 게 많다. 또한, 무엇보다 서로의 습관에 익숙해져야 한다. 모름지기 여행은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다들 무언 중 다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척하면 삼천리'일 것이므로. 봄과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곳곳에서 그 흔적을 본다. 길바닥에 봄나물을 펼쳐두고 제철맛을 상기시키는 할머니 구부정한 허리에 얹힌 햇살은 애잔하다. 걸음이 힘들다고 투덜대는 아이 콧등에 반짝이는 땀방울은 앙증맞다. 아이 옷깃을 부여잡고 달래는 엄마 이마에 번진 화장기는 어색하다. 해말간 여자 아이들이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지난다. 찰랑대는 머리카락에서 부서지는 향긋한 냄새에 눈치채지 못하게 킁킁댄다. 식당에서 막 나온 영감님이 종이컵에 담은 커피를 후룩후룩 소리내어 마셨다. 돌담 모퉁이 너럭바위에 세워 둔 지팡이가 바람에 기우뚱한다. 화들짝 놀란 영감님이 중절모를 잡으며 허리를 굽혔다.
동료직원 어른 육순잔치 때문에 강진에 내려온 적 있다. 다산다복한 집안이라 식솔이 대단했다. 이곳 사람들 자존감은 유난스러웠다. 때마침 눈앞 선거 이야기가 화제로 오르내린다. 평민당 밖에 찍을 인물이 없다는데 모두 동의한다. 어른이 일어서서 진도홍주 댓병을 들고 내게로 왔다.
'집이 어디요?'
'대구에 어른이 계십니다.'
떠들썩하던 좌중이 순간 조용해졌다.
'여그서 경상도쪽 분은 혼자요오.'
옆에서 나를 맞춰주던 이집 장남이 호기롭게 웃었다. 술은 나눌수록 유쾌하다. 불콰해진 자리, 앞다퉈 따뤄주는 홍주를 겁도 없이 벌컥벌컥 마시고는 인사불성인 채 올라왔다. 그때의 강진은 멀기도 했다. 광주에서 교통편을 갈아타야 해서 꼬박 한나절 이상 걸렸는데, 차암 빨라졌다. 길이 있어 이어지는 공간처럼 그렇게 시간도 맞닿는다. 차 앞유리에 와 부딪는 꽃잎들. 파르랑대기도 하고 뒤집혀 까딱이다가는 떨어져 하늘하늘 멀어진다. 운율에 담아 혼잣말로 되뇌어 본다.
너와 나도 그렇게 닿지 않았던가. 길이 끊어졌다고, 꽃이 졌다고 기억마저 사그라지겠는가.

풍류에 젖은 강진 땅은 풍요롭다. 강진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비릿한 냄새가 섞여있다. 물이 들이차는 갯가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고니 두어 마리가 한나절을 견딘다. 안온한 흙냄새가 부썩부썩 일어난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를 만났다. 영랑생가 툇마루에서 익숙한 노래처럼 영랑의 시를 생각나는 대로 읊조렸다. 핏빛 동백이 송두리째 떨어졌다. 꽃이 지기로서니 서러울까. 비로소 봄이 왔다.




















David London, Capture The 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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