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해진 건가. 가끔씩 주어지는 스트레스나 과로를 주체하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몰두할 만한 다른 일이 필요하다. 활동적인 일이야 지금으로도 충분하여, 시간이 나면 책을 읽었다. 서가에 있는 책이나 쌓아둔 책 가운데 무작위로 뽑아서 읽고 또 읽었다. 어떤 책은 진작 읽었는데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또, 읽다 보면 알고 있는 대목도 있다. 그건 다음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훑듯이 읽었다. 둔 지 오래된 어떤 책은 읽다가 만 흔적도 있다. 나중 부분을 거듭 읽어도 떠듬거리는 게 머릿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길을 잃은 것처럼 책 속에서 망연자실했다. 왜 읽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선현의 이야기들을 골라내어 암탉이 알곡에 달려드는 것처럼 쪼아먹을까 했더니 그렇지도 않다. 받아들여지는 글이 있는가 하면 쉽게 내쳐지는 글도 많다. 글에 대한 편식이 자못 심해진 걸까.
꿈에서는 죽은 내가 떠돌았다. 죽은 이들과 함께 있는 내가 실감나지 않지만 생전의 나를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 산 나와 명징하게 구분되었다. 허둥대며 무언가 찾아 헤매기 일쑤였는데 그게 모호했다. 먼지가 앉은 다락에 올라가 머물거나 어머니가 아끼시던 장독대 주변을 기웃거렸다. 죽은 다음에도 생각만은 끊어지지 않아 마음에 둔 근심거리를 해결하려고 작정하는지도 몰랐다.
한밤중에도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책상에 앉았다. 희붐한 새벽빛이 창에 떠오를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책에 표식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편이어서 어떤 구절은 뽑아내 메모지에 적어 두기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지난 시간의 연서처럼 여겨져 덧없다. 이른 출근길에도 열린 근화당 지긋한 약사는 습관처럼 신문을 뒤적인다. 붓을 만지는지,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立春書가 쌓인 게 약국 진열대에 한 며칠 보이기도 했다. 길목 커피전문점 가베가 문을 연다. 커피콩처럼 동글동글한 여자의 친절한 웃음을 떠올렸다. 기다렸다가 진한 커피 한잔을 들고 갈까 하다가는 포기한다. 차츰 길거리 사람이 많아진다. 사무실 뒤편 연립주택에서 쫓아나오는 이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지난 번 목발에 의지할 때 차를 넣고 빼는 것을 지켜보던 여편네 눈초리에서 느낀 일이지만 은근한 저항을 보았다. 직접적인 상관이야 없어도 찔끔한다. 부지가 작아 재개발이 수월치 않다 보니 그 중앙에 들어앉은 회사에 대한 원망의 일환인 것만 같다. 자주 마주치는 게 묘하다. 늘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데, 대놓고 돌직구를 날릴 수 없다. 딱히 필요한 때도 독설을 참아야만 했다. 바람이 없어도 낱낱의 벚꽃잎이 하늘하늘 휘날렸다. 근화당 아저씨의 시간과 가베 여자의 웃음, 연립주택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원망스러움이 뭉뚱그려져 떨어진다. 내 생의 하루도 이와 같겠지.
Vitalij Kuprij, Crying in the Shad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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